홀컵에 빨려간 느낌을 보았다
우연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컨디션이었는데도 동반자들이 제안한 해외 첫 골프여행을 포기할 순 없었다.
예상과 달리 바닥까지 떨어졌던 컨디션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성 방광염은 나은 듯하면서 다시 재발하기를 반복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른쪽 어깨마저 말썽이었다.
여행을 떠나기엔 모든 환경이 악조건이었다.
그런데도 동반자들과의 약속을 깰 순 없어 집에 있던 모든 약을 싸들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에서 만난 동반자들의 초롱초롱한 눈빛 뒤에 숨은 나의 찌릿한 통증은 죽은 듯이 있어야 했다.
몇 시간 후 베트남 달랏 리엔크엉 공항에 도착한 동반자들의 눈빛은 얄미울 정도로 이글거렸다.
나의 컨디션과 통증 따위엔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동반자들의 태도가 좀 서운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여기까지 왔는데 모두의 기분을 망칠 순 없으니 아픔을 내색하지 말고 합류할 수밖에.
솔직히 죽을 맛이었다.
숙소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도 혹 나 때문에 분위기 다운될까 봐 감정 가면을 쓴 채 계속 필드에 나갔다.
마지막 삼일 째 날이었다.
하늘의 도움인가 운빨이 내게 오는 듯했다.
나는 동반자들한테 들키지 않게 조용히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왠지 파쓰리를 만나면 반가웠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 나왔다.
하지만 뭔가 될 듯 말 듯하더니 어긋나기 일쑤였다.
어느덧 후반홀 마지막 파쓰리였다.
이번엔 진짜 마음을 비우고 힘도 빼고 편안하게 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웬걸, 바로 앞 동반자의 공이 홀컵에 빨려가는 걸 목격하고 말았다.
홀인원이었다.
말로만 듣던 홀인원의 현상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얼싸안고 환호하는 우리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들, 카트를 타고 이동하면서 박수를 쳐주던 사람들, 어떤 이는 축하하고 난 뒤 맥 빠진 기운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거 같았다.
본부에서 홀컵 주변 카메라를 확인하는 동안 경기 진행이 잠시 멈추었는데도 흥분된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홀인원 하는 것보다 더 기뻤고 심장이 파닥거려 공을 칠 수가 없었다.
내게 올 것 같은 운빨이 동반자에게 넘어갔을 거란 미성숙한 생각이 살짝 스쳤지만 무시하고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티 없이 맑고 청명한 달랏의 햇살이 우리에게 행운을 주는 거 같았다.
단단한 땅을 덮고 있던 초록의 편안함과 공기 중에 다가온 해맑은 평온이 남아있던 나의 통증을 어루만지는 거 같아 틈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기분전환이 되었고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상황에 따라 조금 손해 본 느낌이어도,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대놓고 표현한 것보다 가면 속 감정으로 마주할 때 함께 한 모두에게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었다.
언젠가 나에게도 나만을 위한 운빨 당기는 날이 올 거라 믿으며 모든 순간에 좀 더 집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운빨은 홀인원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