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이 되어 진로를 명확히 정하지 못했던 나는 행정고시에 뛰어들었다. 명확한 목적의식 없이 2년의 시간을 고시생으로 보내고는, 안 되겠다 싶어 ‘신의 직장’으로 떠오른 공기업 취업준비에 뛰어들었다. 아마도 이런 테크트리를 탄 또래 MZ친구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다른 MZ친구들은 그렇지 않을지 모르나, 나만큼은 확실히 공직에 대한 사명감이 없었다. 공익을 위해 일하는 것 물론 좋지만, 그것을 위한 뜨거운 열정같은 거 없었다. 게다가 굳이 워라밸을 챙겨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철밥통이 좋은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직을 진로로 정한 것은 그저 ‘내가 할 만해 보여서’였다.
공부를 열심히 해 서울의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대학교 성적은 좋지 않았고, 전공도 철학과이니 써먹을 데가 없었다. PPT, 언변, 외국어 등에 이렇다 할 재능이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할 줄 아는 게 ‘수험공부’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인 ‘수험공부’를 선택했던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렇게 어린 내 선택들을 돌아보며 뭐가 그리 보수적이었는지 답답하게만 여겼다. 남들이 못 할 것들도 한 번 해보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그렇게 도전적으로 살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를 되새김질했다.
그러다 한 번은 글쓰기모임에서 대학생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맥주를 한 잔 걸친 내가 꼰대스러운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인생은 역시 속도보다는 방향인 것 같아요. 충분히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고, 이것 저것 탐색해 보는 거, 중요한 거 같아요. 전 그걸 못해서 이렇게 맨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고요. 이제 와서 꿈을 찾으려고 하니까, 지난 시간들이 후회되고 아쉽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25살 대학생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해봤으니까 후회하는 거 아닌가요? 안 해봤으면 후회도 못하죠.”
아차. 그것이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다 해본 나다. 왜 지난 나의 선택을 답답하고 아깝게만 여겼을까. 결국 그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을.
만일 내가 이런 삶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역시 후회했을 것이다.(아마 더 후회했을 것이다.)
고시공부를 하지 않은 채 공기업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면, ‘그래도 문과의 최대 명예라는 행정고시 한 번 도전해 볼 걸, 나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하며 세종시 사무관들을 동경했을 것이다.취업준비도 하지 않은 채, 전업작가가 되겠다고 뛰어들었다면 ‘남들처럼 안정적인 직장 다니면서 따박따박 월급 받고, 육아휴직하고, 그렇게 사는 게 제일인 것을...’하며, 혁신도시를 지나갈 때마다 '저 직장이 내 직장이었어야 해...'하고 울부짖었을 것이다.그리고 퇴사를 하지 않았다면, ‘아, 작년에 퇴사했어야 했어.’하고 역시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겠지.
그리고 분명한 것은, 지난 나의 선택들이 하나하나 경험치로 쌓여서 오늘의 내 결정에 힘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최소한 내가 사무관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최소한 지금의 나는 공공기관에 다니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지난 나의 모든 선택들에 감사해야 함을 깨달았다. 비교할 수 있는 지난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의 내 선택에는 더 확신이 생긴다. 그러니, 후회할 필요가 없다.
인생에 답은 없으며, 인생의 모든 선택에는 가르침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면 된다.
그러니, 내일도 걱정이나 후회보다는, 오늘의 내 선택에 책임을 지는 즐거운 하루를 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