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남편이 고생한 걸 옆에서 지켜봐왔으니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친정식구들에게 소식을 알렸더니 다들 한턱을 내란다. 삼 남매도 아빠한테 한턱 쏘라며, 아빠가 승진을 했으니 자기들 용돈도 인상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며 강력하게 용돈 인상을 요구했으나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몇 년간 남편은 상사와의 갈등으로 마음고생도 많았고, 담당한 업무로 인해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그러는 사이 남편의 검은 머리는 어느새 하얗게 샜다.
그동안 고생한 부분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니 기쁜 마음 한편 남편이 짠하기도 했다. 어찌 됐든 가족을 위해 힘든 단계를 참고 견디고 있음을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지역으로 이직을 할까, 남편이잠깐 이야기를 했을 때 망설임과 고민끝에 결국 가도 된다고 말은 했지만 남편 없이 나 역시 일을 하면서 삼 남매를 돌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남편은 계속 자신의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남편은 부인 덕분이라며 감사하다고 짧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감동이었다.
퇴근길에 빵집에 들러 케이크를 샀다. 가족 수만큼 5개의 초를 사고 남편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다. 아이들에게 아빠 승진 파티는 절대 비밀이라고 쉿! 하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저녁을 먹는 도중에 막내가 "아빠, 이따가 아빠는 방에 들어가 있어. 그리고 우리가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 돼" 아주 신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이거 남편이 눈치채겠네.
식탁을 정리하는데 아이들이 빨리 방으로 들어가라며 아빠를 쫓는다. 충분히 남편이 눈치챘겠다. 이 녀석들.
초코케이크에 5개 촛불을 켜고 거실의 불을 끈 다음 안방 입구에서 아이들이 아빠~하고 불렀다.
문을 열고 아빠가 나오자 아이들이 생일 축하노래를 승진 축하로 바꾸어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미 눈치를 챘을 테지만 남편도 기쁜 표정으로 촛불을 후~ 하고 불어주었다.
둘째 아이가 히죽히죽 웃으며 아빠에게 다가가더니 아빠 코에 초코를 콕하고 붙였다.
우리는 신나게 웃었고, 큰아이와 셋째 아이도 아빠 코에 초코를 붙였다. 초코케이크도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나는 저번 서울 방문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한 작은 소나무 스탠드를 남편에게 선물했다. 소나무가 장수를 상징하는 만큼 승진한 남편에게 항상 건강하고 좋은 기운을 듬뿍 주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을 담았다.
사계절 내내 푸르른 소나무처럼 지금의 열정으로 항상 열심히 하고 또 우리 가족을 위해 건강하길 바래요. 남편.
[남편은 책상 모니터에 이렇게 올려두었다. 건강하고 좋은 기운을 남편에게 주길. ]
그러고 보니 신혼 초에는 셀 수 있었던 새치가 12년 사이에 부쩍 늘어 어느새 흰머리가 더 많아진 남편이다.
그동안 미용실에서 머리 염색을 했는데 이번 여름인가 이젠 집에서 염색을 하겠다며 나에게 염색을 부탁했다.
사실 한 번도 안 해봐서 겁도 났지만, 어릴 적 엄마가 아빠 염색해 주시는 것도 봤고 또 요즘엔 셀프로 집에서도 다들 하니 왜 못하랴 싶어 승낙을 했다.
이번이 네 번째인가. 둘째 아이는 염색을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4:1 다수결로 남편은 염색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 문제를 왜 다수결로 정해야 하는 것일까..ㅋㅋ
나도 조금은 요령이 생긴 것 같다.
"손님 염색 시작합니다. 커피 한잔 드시겠어요?" 남편이 좋아하는 아메리카도 한잔 곁에 놓아준다.
남편의 흰머리는 보는 것보다 정말 심각하게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로 앞쪽이 새하얗게 많았고 뒤쪽으로 넘어갈수록 흰머리 수가 적었다.
나도 부쩍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신경이 꽤 쓰인다. 염색을 해도 한두 달이 지나면 흰머리는 또 희끗희끗 자라난다. 그렇다고 수시로 염색을 할 수는 없고 가끔은 브라운톤의 헤어라인 커버쿠션으로 흰머리를 톡톡 가리곤 하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이 안 볼 때, 남편이 없을 때 한다.
남편의 흰머리는 직접 염색을 해주지만, 남편에게 내 흰머리는 보여 주고 싶지 않은(이미 남편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건 최소한의 자존심이랄까. 그게 뭐라고.
사무실 동생은 둘째 아이까지 낳고 나니 부쩍 흰머리가 많이 생겼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검은색 모발인데 정수리 부분에 흰머리가 자꾸 늘어나니 염색은 하고 싶지 않고 일단 보기 싫어서 가위로 흰머리만 싹둑싹둑 자른다고 했다.
과연 내가 흰머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까. 흰머리! 네가 뭐라고. 참.
[흰 수염마저 매력적이다니! 흰 머리와 흰 수염이 단순히 나이들어 보임이 아니라 중후한 분위기를 주는듯. 조지클루니라서 가능한 일인가]
몇 개월 전엔 첫째 아이 앞머리 쪽에서 새치를 발견했다. 아이가 신경 쓸까 봐 헉! 속으로만 놀라고 남편에게 살짝 말했는데 남편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엄마! 흰머리가 났어"하고 새치를 발견하고는 나에게 뛰어왔다.
"그건 흰머리가 아니라 새치라고 하는 거야.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나 보네. 뽑아도 될 것 같은데?" 나는 별것 아닌 것처럼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아이는 동생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거라며 나에게 뽑아달라고 했다. 그 뒤로도 2~3번쯤 새치를 더 발견한 것 같은데 다행히 아이는 아직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남편 이마와 귀에 닿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면서 쓱쓱 염색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남편은 처음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요구사항이 많더니 이젠 내 실력을 믿는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넉넉히 여유 시간을 두고 남편은 머리를 감았다. 다행히 염색은 잘 된 것 같다.
남편이 예뻐졌다.
남편도 흰머리가 신경 쓰이는지 종종 욕실 거울 앞에서 흰머리를 뽑는데 그럴 때마다 매번 세면대에 아무렇게 놓아두고 그대로 나오곤 한다.
처음엔 깜빡했나 하고 정리를 하면서 반드시 화장지에 담아서 버리라고 알려주었는데 늘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