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처음으로 시골집에 내려갔습니다. 저는 며칠 머무르며 엄마와 함께할 계획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펑펑 쓰며 시골집에 머무르기는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하고 이직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엄마와 보내는 시간에는 늘 제약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시간을 무기로 얻은 무적의 백수입니다.
오늘은 엄마와 감나무에 약을 칠 겁니다. 감나무가 튼튼하게 자라고 해충의 피해를 막기 위해, 그리고 건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름의 해는 짧습니다. 날은 밝아도 뜨거워지기 전에 일을 하기 위해 새벽 6시에 일어나 밭으로 나갔습니다. 엄마께 우리가 약을 칠 땅의 평수를 여쭤봤더니 천오백 평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오백 평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넓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마당과 텃밭, 감나무 밭, 그리고 시골 주택 관리까지. 예전에는 이 일을 부모님 두 분께서 해오셨습니다. 진즉 일손을 도왔더라면 아버지가 조금 더 오래 사셨을까요.
귀농생활에 대한 환상이 있으신 분들이 많을 텐데 시골에서의 삶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부지런해야합니다. 특히 잡초, 땅만 있으면 자라는 그 지독하고 경이로운 생명력과의 전쟁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늘 잡초와 전쟁을 하셨습니다. 원래도 성격이 깔끔하신 편인데 여름의 풀은 지독스럽게도 왕성하여 언제나 아버지의 레이더망에 거슬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전쟁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었습니다. 평일에 주 5일 현장에서 회사일을 하시고 주말이면 시골집에서 밭과 마당을 가꾸셨습니다. 제초기로 깎고 약을 치고 손으로 뽑고…. 그래도 자라는 것이 잡초입니다
사실 아버지의 빈자리가 생기기 전까지 저는 늘 정리된 시골집만 봤기 때문에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맞이하는 첫 여름, 잡초의 혈기왕성함에 놀란 엄마는 매일 퇴근 후 한 시간씩 마당에 풀을 뽑는다고 하셨습니다. 안 그러면 이틀 만에 풀이 무릎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실제로 닭장 앞까지는 관리가 어려웠는데 거기서 자란 녀석들은 키가 족히 1미터를 넘습니다. 엄마가 잡초라고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키우는 작물인 줄 알았을 만큼 무성하게 잘 자라는 녀석들입니다.
며칠 머물면서 내가 좀 뽑아 놓으면 엄마가 편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틈만 나면 쭈그려 앉아 잡초를 뽑았습니다. 누가 뿌린 것도 아니고 키운 것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잘 자랄까요. 지독스러우면서도 경이로운 이 생명력은 어떤 힘을 원천으로 하여 시작되는 것일까요.
나라는 인간은 서른이 되도록 뿌리내릴 곳을 찾아 헤매는 중인데 이 녀석들은 땅이라면 부지런히 뿌리를 내립니다. 결국 저는 전(前) 직장에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마치 저 잡초처럼 그곳에 뿌리 내리기 위해 애쓰고 있겠지요. 어쩌면 저는 풀 한 포기가 가진 의지보다 적은 간절함으로 회사를 다녔는지 모릅니다.
퇴사할 무렵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이렇게 버티는 것보다 간절한 사람이 이 자리에 앉는다면 그게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물론 신입이 아니고서야 그런 의지로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반대로 모두가 잡초만큼의 의지도 없이 회사를 다닌다는 현실이 슬펐습니다.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고 있을 시간에 시골집에서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고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드는 것 같습니다.
감나무에 약을 쳤습니다. 처음 심었을 때는 제 무릎께 정도였던 녀석들이, 심지어 생긴 것도 나무막대기에 가까웠었는데, 어느새 자라 제 키를 훌쩍 넘고 열매도 맺습니다. 이 감나무는 부모님의 노후 계획으로 심어진 녀석들입니다. 두 분이서 감을 키우고 곶감을 만드는 일을 하며 늙어갈 계획이었습니다.
천오백 평의 땅이라고 해서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이곳은 정말 시골이어서 서울과 땅값과는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 그저 부모님 두 분이 노후에 들어와 살며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기 위한 정도의 준비였지 형편이 넉넉했던 것은 아닙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딱 일한 만큼 얻은 것이 아버지의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안쓰럽고 씁쓸합니다. 노후에 살 집을 준비해오셨지만 정작 미래는 누리지 못하셨으니까요. 근면성실했던 아버지를 보며, 막연한 미래는 준비했으면서 정작 현재의 본인을 돌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넓은 마당도, 밭도, 감나무도, 엄마도 다 존재하는데 아버지는 계시지 않으니까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나 막연한 미래를 준비합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더욱 미래에 기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 또한 직장생활을 하며 연금이나 보험 같은 장치를 준비했었습니다.
제가 첫 월급을 탔을 때, 엄마는 제 손을 잡고 은행으로 달려갔습니다. 적금과 연금을 들어주셨는데 특히 연금의 경우 제가 직장생활을 하지 않을 때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이어갈 수 있게 10만원으로 정해주셨습니다. 엄마의 판단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 딸이(이제 막 돈을 벌면서 돈 쓰는 맛을 알게 된 딸이) 현재를 즐기면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금액이 10만원이셨나 봅니다.
그 연금은 백수가 된 현재에도 꾸준히 들고 있습니다. 엄마는 서서히 늘려가라고 하셨는데 정작 7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늘리지 않았습니다. 딸은 미래에 대한 준비보다 현재를 즐기는 것에 가치를 두는 인간이라 그랬나 봅니다. 하지만 먼 훗날에는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많이 벌 때 저금을 해놨어야 궁핍한 노후를 대비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얼마큼 소진해야 적절한 걸까요. 엄마가 정해주신 10만원의 금액처럼, 제가 지금 행복하면서 훗날을 준비할 수 있는 선을 명확히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단 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예시로 든 것이지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아버지만 봐도 노후를 위해 평일과 주말 가릴 것 없이 일하셨지만 미래가 오기 전에 몸이 버티지 못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본인의 신체 한계를 알고 지금에 집중하는 법을 아셨다면 적절한 때에 휴식을 취하고 몸을 회복하면서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럼 본인이 준비한 노후를 조금이라도 누리셨을 텐데. 그런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남겨진 사람의 몫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현재를 너무 소진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에 대한 연장선으로 퇴사를 선택하기도 했고요.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현재와 미래 사이의 적절한 선에 대해 고민해봤으면 합니다. 막연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너무 희생시키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면 지금을 지나치게 소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정답이 없는 문제지만 목표는 분명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내가 언제나 행복하길 바라는 것.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가치는 이 목표로부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