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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Aug 24. 2021

사실은 글을 쓰고 싶었어요.

[퇴사일기#2] 대청소와 탈락 소식

 오전 9시 30분에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몸은 늘 이 시간에 일어나고 싶었나 본데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6시 50분에 일어나야 했으니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요. 눈을 뜨자마자 TV를 켰는데 신기하게 볼거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시간에 TV 시청도 하던 사람이 하는 건가 봅니다.

 그렇게 TV에 흥미를 잃고 열어본 카톡에는 저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의 연락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습니다. 회사 사람의 카톡이 있군요. 어제 처리해준 일이 미흡했었나 봅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어제 작별한 줄 알았던 보고서를 다시 열어 수정해서 파일을 송부해줍니다. 이제 진짜 끝난 걸까요. 회사에서 나오기 전까지 2주 동안 인수인계를 했지만 잘 전달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회사에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저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인데 말이죠.






 오늘의 가장 큰 목표는 '대청소'입니다. 하기 싫은 일도 하는 것이 어른의 삶이겠지요. 그동안 회사일 한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집안일을 처리할 생각입니다. 개판 5분 전도 아니고 그냥 개판입니다.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이 머무는 곳에 흔적을 남기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만 하러 가는 회사에서도 내 흔적이 남는데 나를 품고 담는 집은 오죽할까요. 그래서 주말마다 치워도 집은 금방 더러워지나 봅니다.

 가사노동은 티가 나지 않는다고 하죠. 게다가 우리 사회가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받아들인 지 얼마 안 된 것을 생각하면 저희 삼 남매를 키워낸 엄마의 노동력에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생각뿐입니다. 이제 회사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핑계가 사라졌으니 한동안은 가사노동에 충실할 계획입니다.

 감사하게도 동거인(남편)의 청결도와 저의 청결도는 비슷한 수준입니다. 직역하면 집이 개판 이어도 회사에서 지쳤을 상대를 생각해서 '집이 왜 이 모양 이 꼬라지야!'하고 서로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마 저보다 깔끔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굉장히 괴로웠겠지요. 반대로 반려자가 심각하게 더러웠다면 제가 너무 힘들었을 겁니다.

 반려자를 선택할 때 도덕 수준만큼이나 따져봐야 할 것이 바로 청결에 대한 수준입니다. 미혼인 분들은 꼭 기억하세요. 반려자를 선택할 때는 도덕 수준과 청결도를 따져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데야할지 모를 만큼 개판인 집을 청소할 때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 않은 물건들을 제자리로 옮기는 것이 가장 만만합니다. 그러면 공간이 생기고 공간이 생기면 정리정돈이 가능해집니다.

 회사일도 집안일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따라 일이 너무 안 풀릴 때는 아주 쉬운 일부터 시작하곤 했습니다. 가장 쉬운 일부터 시작하는 것은 격한 운동 전에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풀어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준비운동을 하는 것처럼 몸이 점점 일하던 페이스를 찾게 되고 이후에는 조금 덜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할 수 있게 되지요.

 어차피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할 거 조금이라도 정신건강을 지키고 싶다면 쉬운 일부터 시작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저는 그 방법의 효과를 꽤 많이 봤습니다.






 집을 치우고서 쇼파에 앉아 쉬고 있는데 어제 본 면접 결과가 좋지 못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거리의 문제로 합격해도 고민했을 회사이긴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습니다. 마음 속에는 재취업이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조금 늦혀지는 김에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공존합니다. 그래서 뭘 해보고 싶나 생각해보니 역시 글이었습니다.

 사실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막연히 '늙어서는 글 쓰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버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미래에 대한 생각이었지 현재의 내가 글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문학을 전공한 것도, 글 쓰는 법을 배운 것도,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즘처럼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이 다양한 세상에서 그런 말은 변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글 쓰는 일이 회사에서 주는만큼 페이를 제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회사를 포기하고 글을 쓰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어려운 결정입니다. 생계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에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글로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열망을 전부 막을 수는 없어서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을 썼습니다. 책을 읽고 서평 쓰는 일이나 짧은 수필을 쓰면서 그 커다란 갈증에 물 한 모금 목을 축이는 정도로 해소하며 살았습니다.

 만약 저에게 생계와 관련된 돈벌이 수단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한 번씩 회사에 다니는 일이 정말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막연한 노후를 위해 지금의 나를 소진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꾸는 꿈이 너무 허황된 꿈은 아닐지 두려웠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한 어른으로써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간헐적인 용기를 내보려고 합니다. 퇴사로 받은 퇴직금은 당장의 입에 풀칠은 해줄 겁니다. 백수지만 믿는 구석이 하나 있는 백수인 셈이죠.

 취업 준비와 글 쓰는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지금과 같이 퇴직금을 탄 백수 신분에서 부담을 덜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게 제가 선택한 간헐적 용기였거든요. 그래서 마음 속에는 재취업을 하고 싶다와 그렇지 않다는 마음이 공존합니다.

 제발 이 두 마음이 사이좋게 지내면서 퇴사 후의 '지금' 이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적 가치가 전부는 아니지만 또 일부가 아닌 것도 현실이니까요. 약간의 믿는 구석을 방패 삼아 그동안 고생해온 것에 대한 보상으로 지금의 달콤한 시간을 조금 즐겨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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