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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Sep 11. 2021

뭘 그렇게 껴안고 살려고 애쓰나

[퇴사일기#6] 이사와 책 정리

 이사를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공간에 정을 많이 주는 편이라 계약 만료로 쫓겨난 집에 대한 미련이 꽤 남았습니다.

 결혼하고서 겪는 첫 이사라 긴장도 많이 했습니다. 원룸 수준이 아닌 가정집의 이사는 규모만큼이나 비용도 어마어마하더군요. 여름의 끝자락이지만 약간 흐린 날씨 덕분에 조금은 수월했습니다.

 퇴사를 해서 시간이 나기도 했고, 퇴사 이후에 겪는 가장 큰 집안일이라 저도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쓰던 짐을 고대로 가져가는데도 이사는 낯선 이질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옆에 누운 동거인(남편) 말고는 모든 게 낯설어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한동안 고생할 듯 싶습니다.






 

 이사 전문 업체에서 온 아저씨들은 엄청난 양의 제 책을 보고 한 마디씩 툭툭 던졌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시나 봐요. 만화책 모으는 취미가 있으신가 보네요.

 책이 많은 걸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어서 한 달 동안 미리 이삿짐을 싸놨습니다. 옮기기만 해주면 되는 일을 부탁한건데, 나름의 배려가 무색하게 맥 풀리는 반응이었습니다.

 전에 원룸에서 이사할 때도 가구는 없는데 많은 양의 책에 당황해하셨던 용달차 아저씨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유선상으로 견적을 낼 때 옮길 가구가 있냐고 물으시기에 가구는 없다고 말했던 게 문제였습니다.

 그 뒤로는 이사할 때 무조건 '책이 좀 많아요.'라고 미리 언질 해줍니다. 책 많으신 분들은 이사할 때 참고하세요.

 요즘은 전자책을 이용하시는 분들이 꾸준히 늘고 있는데 저는 여전히 종이책을 선호합니다. 서평 쓰는 일을 몇 년째 하다 보니 자연스레 책이 늘었고,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서포터즈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서 선물로도 책을 받습니다.

 사실 가장 큰 문제점은 제가 전자책의 활자를 읽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상하게 전자책을 읽을 때는 종이책을 읽을 때보다 몇 배의 에너지가 들었습니다. 아마 눈이 모니터로 출력된 글자를 읽는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환경 문제를 생각해서도 전자책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종이책으로 돌아왔습니다. 손 끝으로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다시 이사 이야기로 돌아와서, 오후에 짐을 모두 옮기고서 저는 책부터 정리했습니다. 이사한 집은 방이 하나 줄어서 책장을 하나 무료 나눔 했더니 있을 곳을 잃은 아이들이 수북하더라고요.

 아직 읽지 못한 책과 읽은 책을 하나하나 정리하다가 문득 뭘 그렇게 껴안고 살려고 애쓰나 싶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두 손 조차 비우고 간다는데. 무엇하나 쥐지 못하고 끝내는 삶을 생각하면 저는 무슨 미련이 남아 그렇게 책을 모았을까요.

 어쩌면 제 품에서는 영영 다시 꺼내어질 일이 없는 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것은 책으로서의 가치를 잃습니다. 책은 읽히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더 이상 껴안으려 애쓰지 않고 팔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사 전에 한번 책을 추린 것인데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이 날만 68권의 책을 판매했습니다. 어디론가 가서 읽히는 존재가 되었으면 합니다.







       

 회사를 다닐 때 제 취미는 서평 쓰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글 중에서 왜 서평이었느냐 하면 단연 책 때문입니다.

 현실은 개차반이었지만 책 속의 세상은 달랐습니다. 정의가 살아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온정이 있으며, 옳고 그름이 명확하고, 확실한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현실의 저는 번번이 무너지는 신념을 간신히 붙잡고 버텨내는 삶을 살아서 책 속으로 회피했는지 모릅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상은 분명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야 이곳을 벗어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현재의 개차반을 버틸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니 안쓰럽습니다. 어쩌면 그 안타까운 마음이 제 책장에 차곡차곡 쌓였는지도 모릅니다. 조금은 털어내는 것이 맞겠지요. 이사를 계기로 책을 정리하며 별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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