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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Sep 27. 2021

퇴근이 아닌 퇴사가 하고 싶을 때

[퇴사일기#8] 정당한 퇴사 사유

 어느 날부터 '퇴근하고 싶다'가 아니라 '퇴사하고 싶다'는 말을 자연스레 내뱉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지겨웠습니다.


 퇴근이 아닌 퇴사가 하고 싶을 때, 그 순간이 제겐 기회였습니다. 이 곳에 더 머무를 수 있을지 고민할 타이밍이었습니다.


  회사에 있는 건 누구나 괴롭고 당연히 퇴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퇴근이 아닌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만 드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제서야 드문드문 핏방울이 맺힌 제 손가락이 보였습니다.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손 거스러미를 뜯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충분히 버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분히 구분해봤습니다. 지금 내가 여길 퇴근하고 싶은건지 퇴사하고 싶은건지. 답이 나왔습니다.







"그만두는 이유가 뭔데?"


 퇴사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은 제게 구체적인 퇴사 사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같이 '고생했어.'라는 반응을 보일 뿐. 어쭙잖게 친하거나 친한 척하는 지인들이 가장 많이 물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아는 척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그들의 관심은 제가 겪은 혼란과 괴로움이 아닌 '퇴사 사유'였습니다. 어떤 집단에 함께 속해 있다가 떠난다고 하니 이유가 궁금했겠지요.


 지나고서 생각해보니 그들은 아마도 제가 떠난 후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쟤가 그래서 나갔다는데 알고 있었어?"와 같은, 술자리에서 적당히 짭짤한 안주와 같은. 코로나 시국이라 회식이 줄었다는 것이 적잖은 위로를 주는 부분입니다.


 제가 퇴사를 보고했을 때 팀장님 또한 저의 퇴사 사유를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속 얘기를 다 하고 나오기 싫었기 때문에 말을 많이 가리다 보니 이렇다 할 이유 없이 퇴사한 꼴이 되버렸습니다.


"사실은요, 팀장님 되게 별로예요. 왜 남의 책상 서랍, 메신저를 뒤지십니까? 직원들 다이어리 열어볼 생각은 뇌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그리고 요즘 세상에 어느 회사가 주주총회 안내 도우미로 직원을, 그것도 여직원만 씁니까? 회사 문화도 심각하게 꼰대스럽고요. 권력자가 하는 말이라면 껌뻑 죽는 상급자들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피 말려 죽습니다. 육아휴직을 쓴 사람 어떻게 쫓아낼지 작당 모의하는 윗대가리들 보면서 미래가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어요. 또 일은 안 하면서 야근 시간만 주구장창 늘리는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도 우스웠고요. 본인들이 지시해놓고 그런 말 한적 없다고 내빼는 상급자들 태도에 진이 다 빠집니다. 가끔 제가 콜 직원인가 의심해요. 그리고 프로그램을 사주셔야 업무를 하죠. 한글이나 알집 같은 기본적인 프로그램 사주는데 돈 아껴서 기업은 아주 부자가 되겠습니다. 전임자가 엉망진창으로 해놓은 일을 왜 후임이 다 해내야 합니까. 남의 똥 치우는데만 1년이 걸렸습니다. 또 독감은 국가에서 지정한 전염병인데 왜 제 연차를 소진해서 쉬어야 합니까. 회사에 나가지 말라고 국가에서 지정한 병인데 왜 제가 제 연차를 쓰면서 욕먹어야 하냐고요. 마지막으로 남의 남편 욕은 왜 합니까? 당신이 제 상급자지 제 남편 상급잡니까! 아니, 상급자면 그래도 됩니까?참, 아직 더 있는데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그래서 탈출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말했다가는 제가 이 업계에 다시 재취업이 불가능할 것 같았거든요.


 퇴사를 하면서 안 그래도 손해를 보는데 추후에 받게 될 손해까지 따지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상의 문제라던가, 학업이라던가, 집안 사유와 같이 둘러대는 수준의 이유를 대고 탈출하겠지요.


 절이 싫은 중들이 떠나면서 고착된 사회 분위기를 어항 물갈이하듯 바꾸는 게 힘들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만한 피드백이 나오지 않는 것은, 대부분 퇴사자가 상대적 '약자'에 속해있기 때문일 겁니다.


 새로운 직원이 들어왔을 때, 그들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보다 기존의 정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고립시키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다수의 강자가 한 사람의 약자를 만들고 기존의 정서는 더욱 굳건해집니다.


 그런 답습이 계속 된다면, 우리의 퇴사 사유는 앞으로도 건강 상의 문제라던가, 학업이라던가, 집안 사유가 될 가능성이 크겠지요.


 진정 퇴사자의 퇴사 사유를 반영하여 더 나은 회사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면 떠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그들이 이 집단에 더 이상 속해있지 못할 사정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확실하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개선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퇴사자들도 입을 열게 될 겁니다.


퇴사 사유는 가십거리가 아닙니다.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떠나는 사유를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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