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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Oct 20. 2021

퇴사한 지금이 기회입니다.

[퇴사일기#10] 코시국에 떠나는 여행

 많은 사람들이 퇴사 후 여행을 꿈꾸곤 합니다. 퇴직금으로 얻은 경제적 여유와 백수일 때만 누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모두 갖춘 기회가 드물기 때문일 겁니다.

 저 또한 여행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회사 생활이 거지 같을 때마다 상상 속의 비행기를 타고서 몇 번이나 떠났습니다.

 언젠가 맞이할 퇴사의 순간을 상상하는 건, 당 떨어진 순간 마시는 믹스커피만큼이나 효과가 좋습니다. 때론 적절한 기대감이 회사원에게 그 무엇보다 달달한 보상이 되곤 합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순간이 폭삭 망했습니다. 인생은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라더니 제가 이 시국에 퇴사한 것을 포함하여 여행이 불가능한 세상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살면서 퇴사를 몇 번이나 하겠습니까. 여행이란 커다란 꿈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바이러스에 의해 가로막혔습니다. 퇴사 버프 잔뜩 머금고 떠날 날에 대한 기대는 뽑아놓은 잡초 마냥 시들해져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회사 생활을 꾸역꾸역 이어나가는 것도 못할 짓이었습니다. 세상으로 떠나기 전에 세상을 뜰 판이었으니까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국가 간 경계를 넘어 혐오까지 만드는 이 슬픈 시대에, 귀하디 귀한 퇴사자의 신분으로 갈 수 있는 여행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더라도 예전과 같은 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없을 겁니다.

 내 감정이 한껏 담긴 표정은 마스크로 가려집니다. 여행자들은 새로운 만남으로 들뜬 대화보다 서로의 안전을 위한 침묵을 지킬 것입니다.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추억을 보며 설렘을 공유받기 보다 바이러스를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우는 것이 당연해졌습니다.

 여행으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많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실망감에 아쉬운 소리만 그득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 곳으로 여행이 불가능하다면 아주 가까이에 도달해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떠날 수 없다고 이 시간을 통째로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차근차근 버킷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이 여행의 목적은 스스로에게 가장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 흥미와 경험을 위주로 작성해 나갔습니다. 하나 둘 써내려가며 내가 몰랐던 욕구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습니다.

* 동묘 카메라 거리 방문​

 카메라를 좋아합니다. 최근에는 필름 카메라까지 영역을 확장해서 동묘의 카메라 거리에 방문해보고 싶었습니다. 필름 카메라는 대부분 디지털 카메라로 대체되어 현재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중고 밖에 없습니다. 동묘 카메라 거리를 방문하여 카메라도 찾고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습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엄청난 보물을 발견하게 될지.

* 운동 배우기​

 사회생활을 해나갈수록 체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문제는 체력이 없어서 운동을 못 가고 운동을 못 가서 체력이 없어지는 악순환의 굴레 속에 있다는 것. 쉬는 김에 해보고 싶었던 운동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습니다. 필라테스나 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어린 시절 사진 정리​

 본가에 어린 시절 사진집이 있는데 오랫동안 보관만 하다 보니 앨범이 망가졌습니다. 자식 셋을 키우느라 엄마도 사진집에 신경 쓸 겨를이 없으셨을 테죠. 시간이 날 때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이번 기회에 정리하려고 합니다. 추억 여행은 덤입니다.

* 유기견 봉사활동​

 이건 정말 몰랐던 제 바람이었습니다. 이런 걸 찾는 재미가 있는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봉사활동에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는 유기견 봉사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평소에도 개를 좋아하는데 그 관심을 선하게 방출해볼까 합니다. 돌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보금자리 청소나 산책을 해주고 싶습니다.

* 원데이 클래스 수강​

 직장 생활을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어 조금 지쳐있었습니다. 그래서 해보고 싶었던 것이 '원데이 클래스 수강'이었습니다. 하루라서 부담도 없고 어쩌면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베이킹이나 꽃꽂이와 같은 아주 섬세한 수업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배우고 완성시키면 성취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실 사회생활을 해나갈수록 현실에 순응하는 스스로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기강을 잡는다는 둥, 아랫사람이 당연히 참아야 한다는 둥, 사회생활하려면 군기는 필요하다는 둥.

 타당하게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대물림 되는 일들에 에너지가 소모될 때면,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강하게 반발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생활 못 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혹은 그들의 입방아에 제 이름이 오를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군대를 안 다녀와서 저래'였습니다. 군대에서 벌어지는 악습이 반복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생활이 갑갑했습니다.

 사회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개성을 드러내면 안 되고, 신념도 저버려야 합니다. 가끔은 도덕성을 버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잘못을 말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불합리한 상황이 닥쳐도 언제부턴가 무던히 넘기려고 애쓰며 환경에 적응해버린 스스로가 비참했습니다. 그렇게 '나'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집단이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집단에서 많은 사회초년생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회생활을 명목으로 따르고 싶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느라 괴리감과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지금, 퇴사한 지금이 기회입니다. ​

 저는 이번 여행으로 잃어버린 '나'를 다시 만날 계획입니다. 퇴사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지만, 차근차근 버킷리스트를 수행하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잠재된 가능성과 욕망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상황을 힘들어하는지,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는지 등 알아가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아주 멀리 떠나는 것보다 아주 가까이 떠나는 것에서 얻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 값질 수 있습니다. 여행 후기는 종종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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