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전 직장 동료를 만났습니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할수록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나는 게 쉽지 않은데, 저는 운 좋게 그런 사람을 만났고 귀한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전 직장은 유독 여성 차별적 분위기가 심했습니다. 그 곳에서 함께 싸우고 버텼던 동료여서 그런지 가끔 전우애까지 느끼곤 했습니다. 힘든 일을 함께 이겨낸 기억은 관계를 더욱 돈돈하게 만들지요
배경이 비슷해서 더욱 끌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녀와 저는 또래였고,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후 아직 자녀가 없는 2인 가구의 여성 노동자였습니다.
제가 속해있던 팀에서는 자녀가 없는 2인 가구의 유부녀가 저를 포함하여 3명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팀장이 중간관리자에게 그랬답니다. 쟤들 한꺼번에 임신하면 어떡할거냐고.
그 얘길 들은 날에는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우리 부부의 임신 계획까지 회사에 보고할 일인가…? 아님 셋이서 의논해서 각자 임신할 시기를 정해야하나. 내가 남자 직원이었어도 저런 소리를 했을까.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사무직인데 뭐가 문제지?
사실 그 시점의 회사에서는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사용한 여성이 탄생했습니다. (21세기, 2021년의 이야기가 맞습니다.)
많은 분들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헷갈려 하시는데, 출산휴가는 출산 전후로 쓰는 3개월간의 휴가이고, 육아휴직은 출산휴가 이후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쓰는 휴직 기간입니다.
국가에서는 육아휴직 기간을 1년 이내로 지정했으며 저출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출산휴가를 쓴 전례는 있어도 육아휴직은 처음이라 총대를 멘 그 분이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렸던 것이 기억 납니다. 기혼의 상태로 자녀에 대한 계획이 있는 우리들은 그런 소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위협을 느꼈습니다. 육아휴직을 사용한 그 분은 관리자 직급까지 오른 여성 상급자 직원이었고, 저희는 말단의 언저리에 있는 직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아휴직은 고사하고 출산휴가나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했습니다
이 회사가 출산을 앞둔 직원에게 부린 횡포 사례는 더 있었습니다. 차마 여기에 쓸 수 없을 수준에 일이라 쓸 수 없을 뿐입니다. 21세기에 말이 되는 일이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는데, 실제로 직장을 다니는 여성의 육아휴직은 아직까지 썩 자유롭지 못한 편에 가깝습니다.
이윤이 최대 목적인 기업은 절대로 법이 '권장'하는 일에는 힘쓰지 않습니다. 기존 직원의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챙겨주는 것보다 새로운 인력을 뽑아 쓰는 것이 훨씬 편하고 금전적으로도 이득입니다.
국가는 언제까지 저출산 문제에 어정쩡한 태도를 일관할까요. 출산 및 육아의 문제와 관련하여 개인이 기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 아니라면 회사는 직원을 배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이 문제 또한 개인의 역량에 맡겨지는 겁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다시 돌아가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명백히 갖춰지지 않는 사회에서, 국가는 저출산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은근히 젊은 부부에게 넘기고 육아휴직을 '권장'할 뿐입니다. 참 답답한 문제입니다.
30대의 우리들은 그간의 경험으로 개인과 회사의 갈등에서 회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기민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사회의 핵심층으로서 우리 사회가 마주한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있게 인식합니다. 속되게 표현하면 머리가 큰 것이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몰랐다면' 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나았을까. 그럼 이렇게 고민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을까. 임신에 대해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육아를 통해 행복감을 얻을 것이라 확신했을까. 사회를 둘러싼 모성애 신화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을 거둘 수 있었을까.
차라리 어릴 때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경험했다면 저출산 문제를 둘러싼 국가와 기업, 개인에 얽혀있는 수많은 이해관계에 골머리 썩을 일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다가 우리는 무지(無知)의 아름다움에 크게 예찬했습니다. 모르는게 아름답다! 웃고 있지만 입 안은 쓰드릅했습니다.
퇴사를 한 지금 이 시점에서는 금전적인 문제를 제외한다면 임신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회사에 속해 있었다면? 더 높은 상급자에게 잘 보여야하는 나의 상급자의 눈치를 보거나 내 자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글의 서두에 언급한 최초 육아휴직 사용자가 회사로 돌아와서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의 여유를 조금씩 갉아먹는 회사에 충성하고 더 열심히 일할 생각이 들까요.
30대 직장인 기혼 여성의 이런 고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아져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출산 문제에 대한 고찰은 문제를 직시하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더이상 모르는게 약이라며, 무지(無知)가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해학적 태도로 스스로를 자학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마주할 직장인 여성의 임신과 출산과 육아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알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