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전(前) 직장은 이름을 대면 알법한 꽤 큰 규모의 회사였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즈음에는 업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회사였지요. 대표 품목이 있었고 연구개발에도 힘쓰는 꽤 탄탄한 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지난 30년 세월의 풍파를 정통으로 맞은 회사는 점점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젊은 층의 평가 뿐만 아니라, 여러 평가 어플(블라인드, 잡플래닛 등)을 보면 하락세를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영광에 도취된 관리자들은 새로운 바람을 수용할 생각이 없고, 굳이 수용하지 않아도 회사는 굴러갑니다. 수십 년 전에 지은 공장은 그간 강화된 관리체계에 대응 보수하는 것보다 닥친 일에 눈 가리고 아웅 하며 버티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회사에게 직원은 그저 부품일 뿐이니 퇴사하는 젊은이들을 퇴사 사유와 현세대의 생각을 굳이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반영하는 것보다 새로운 부품을 찾는 쪽을 선택합니다. 퇴사자가 나약하고 근성 없어서 퇴사한 것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형성된 역피라미드 구조는 더욱 견고 해지며 '본인들과 같은 사람'만을 찾습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버티지 못할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이런 악순환으로 회사가 굴러갑니다.
가끔 그 회사에 다녔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입사 전, 최종 면접 자리에서 상무님은 이 회사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부터 장밋빛 미래까지.(실제로 상무가 '장밋빛 미래'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회사가 저를 거둬준(?) 것에 대해 직각으로 허리 숙여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 상무님에게 저는 변절자였습니다. 이직으로 그 회사에 입사했기 때문입니다. '한 회사에 충성하지 못하고 개인의 이익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요즘 것들'이라는 말을 돌려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업무 변경과 지역 이동으로 이직을 선택했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죄인 취급을 받으며 '내가 잘못한 건가?' 하는 의심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리숙한 사회초년생이었습니다. 지금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스킬을 사용하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대단한 회사를 퇴직하며 그 명성에 맞지 않는 허술한 퇴사 절차 때문에 꽤 고생했습니다. 팀장님에게 퇴사 의사를 전달하고서 절차를 여쭤봤더니 중간관리자에게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중간관리자에게 물어봤더니 본인도 퇴사는 안 해봐서 모르겠답니다.
퇴사를 하면서 어떤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지, 어떻게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지, 퇴직금은 언제 수령하는지, 회사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는 서류는 어떤 것이 있는지와 같은 업무를 명확하게 담당하는 부서가 없었습니다.
결국 퇴사자 혼자 해결해나가야 했습니다. 저의 경우, 텀블벅(크라우드펀딩의 일종)에서 진행하는 퇴사 관련 펀딩에 참여하여 자료를 수령했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퇴사 준비를 했습니다.
마지막 출근 날, 팀원들과 작은 송별회를 진행했음에도 '진짜 다음 주부터 회사 안 나와도 되나?' 하는 의심이 계속 들었습니다. 퇴사하기 전, 윗사람들 누구누구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라는 가르침은 있는데 정작 퇴사와 관련된 정확한 절차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에 퇴사했던 사람들의 자료를 참고하여 알아서 하라는 무책임한 말에 '그 대단한' 회사의 운영 체계가 이 정도 수준인데 돌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로웠습니다.
그렇게 퇴사를 했고 며칠 후 회사의 감사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작성한 인수인계서의 자료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순간 참아왔던 울분이 터졌습니다.
퇴사 절차나 예시 자료는 제공한 적도 없었으면서 이제와 제출한 서류가 부족하다고 연락하는 게 맞는 일이냐고, 속으로는 비꼬는 말투와 오만가지 욕이 나왔지만 꾹꾹 눌러 최소한의 불만만을 표했습니다. 제가 다시 이 업계에 취업할지도 모르니 마음의 소리를 마음껏 내뱉을 수는 없겠지요. 언제쯤 기업을 상대로 찍- 소리 낼 수 있는 노동자가 될 수 있을까요.
가장 기분이 나빴던 것은 퇴직금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법적으로 퇴직금은 퇴사 후 14일 이내 제공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퇴사자는 회사를 상대로 퇴직금에 대한 연체료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식적인 퇴사일로부터 47일이 지난 이 시점에도 퇴직금을 수령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제가 작성한 서류 때문이었답니다.
퇴사 시 작성한 서류 중에는 아주 조그만 글씨로 '익월 안으로 퇴직금을 지급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문구가 있었다는데, 저는 그 서류를 작성하면서 그 문구가 있는 줄도 몰랐고, 그 문구에 대해 설명을 받지도 못했고, 그 문구에 비동의할 수 있는 선택지도 없었습니다. (무조건 서명해야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서명을 받을 거면 설명이라도 제대로 해주는 게 퇴사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는 회사를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로부터 거의 두 달이 되는 시점에 퇴직금을 수령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퇴사와 관련된 관리 절차가 부족하다는 것에 대해 회사 측에서는 인정도, 나아가 인식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시대에 기업의 성장과 발전은 단순히 명성이나 매출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인, 잡플래닛, 블라인드와 같은 사이트를 통해 조금만 검색해봐도 회사 수준을 얼추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재 회사에서 근무하는(혹은 근무했던) 근로자의 생생한 증언으로 임금, 복지, 업무강도, 분위기 등이 평가됩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회사가 직원을 평가하듯이 직원도 회사를 평가합니다. 복지나 운영 시스템, 관리 절차와 같은 부분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직원이 의견을 전달했다면 수용하고 개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런 견제 시스템이 활성화되어야 기업 측에서도 개선 의지를 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노동자는 영원히 기업을 상대로 찍-소리도 못하는 존재가 되겠지요.
퇴사 절차는 누가 알려주나요? 퇴사자에게 제대로 인수인계하지 않았다고 연락하려면 최소한 퇴사와 관련된 안내나 절차적 도움을 주고서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모름지기 모든 일에는 시작만큼이나 끝맺음도 중요합니다. 몇 년씩 그 회사에서, 나름 회사를 위해 일 해온 직원인데 마지막이 이런 식으로 구리면 결국 남는 건 찝찝한 이별뿐입니다.
제가 처음 입사했을 때 제게 변절자라고 나무라던 상무님의 태도에서 느꼈던 모멸감이 떠오릅니다. 회사에서 퇴사 절차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퇴사자를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나 '변절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변절자가 아닙니다. 제가 판단했을 때 더 이상 이 회사에 머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온 것이지 죄를 지은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떠난 이를 탓하기보다 왜 떠났는지 묻고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이 기업이나 집단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길입니다. 어쩌면 과거의 영광에 도취된 기업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