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옹알이 Oct 24. 2021

배움에 대한 비용

[퇴사일기#12] 필라테스를 시작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로 버텼던 첫 회사에서 1년 3개월의 시간을 보낸 후, 몸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주 52시간의 근로법이 적용되기 전이라 야근과 특근에 제한이 없었습니다. 한달에 야근을 100시간씩 했습니다. 부풀린게 아니라 진짜 경험담입니다.

 9시에 출근해서 보통 때 밤 10시에 퇴근했습니다. 일이 밀릴 때는 새벽 2시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버스가 오후 10시면 끊기던 동네라 택시를 자가용처럼 이용했습니다. 한달 택시비만 20~30만원이 나왔으니까요.

 주말도 없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 중 하루는 무조건 출근했고, 2주 연속으로 주말 출근(토, 일요일 모두)을 하면서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몸을 갈아 넣었던 첫 회사는 제 20대 중반을 날려버렸고 남은 건 거덜난 체력 뿐이었습니다.

 직종을 바꾸며 입사한 두번째 회사에서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사무직이라 컴퓨터 앞에서 일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는 괜찮았지만 4년 넘게 적응하지 못한 스트레스가 문제였습니다.

 무능력한 경연진과 꼰대 상사의 대환장 파티, 사내 정치와 술을 강요하는 회식 문화, 개인주의를 배척하다 못해 매도시키는 분위기, 능률보다 야근 시간으로 평가되는 업무 능력 등등.

 결국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거식증과 폭식증을 앓았습니다. 스트레스로 무너진 몸은 만성피로, 구내염, 역류성 식도염, 습관성 위염, 생리통, 월경전증후군, 저혈압, 미주신경성 실신으로 아우성쳤고 그렇게 20대 후반이 또 날라가버렸습니다.







 온갖 잔병치레로 병원에 들낙날락하며 만난 여러 의사 선생님들은 공통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애쓰라'는 처방을 내렸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라는데 기본이 가장 어렵더군요. 면역력 증진과 스트레스 완화를 위해 적당한 운동을 추천했지만 어릴 적부터 체력이 약했던(아니 거의 없던) 저는, 회사를 다니면서 운동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주 2~3회 야근을 하고나면 운동 할 힘과 의지가 사라집니다. 몸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귀찮아서 밥도 안 챙겨먹는 인간이 운동을 할 리 만무합니다. 체력을 키워야 운동할 힘이 있을텐데, 체력을 키울 시간이 없는 슬픔은 이 시대의 모든 직장인이 겪는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퇴사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운동이었습니다.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내 몸을 돌보는 일! 모두가 알고 있지만 쉬이 실천하지 못하는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심해지는 거북목과 허리통증은 정형외과 물리치료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이 필라테스입니다. 체형교정과 몸의 밸런스를 잡는데 도움을 준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효과는 알고 있었으나 1시간에 8~12만원 정도를 지불해야하는 운동이라 사실 고민이 많았습니다. 비용적 측면에서 큰 부담을 느껴 회사를 다닐 때도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간이 날 때가 아니면 언제 운동을 제대로 해보겠냐며 호기롭게 학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첫 상담 때 선생님은 필라테스의 이런저런 효과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제 체형이 얼마나 틀어졌는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레슨비를 본 순간, 예상대로 동공이 지진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가격을 보고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파악한 눈치였습니다. 서로 불편하고 콕 집어 말하기 힘든 돈 이야기.

 마치 영화 <해리포터>에서 '볼드모트'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상담은 어색하게 끝났고 저는 운동을 등록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쌌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돈을 씁니다. 얼마 전 저축 관련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평소 돈을 쓸 때 '보이는 것을 소유하려는 편'이냐 '보이지 않는 것(경험 등)에 지불하는 편'이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소유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힘들게 번 돈을 쓸 때에는 무언가 내 수중에 남겨야 가성비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쇼파에 앉아 필라테스 비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중 갑자기 그 설문조사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래서 망설였나봅니다.

 막상 꼬집히고 보니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상담 후 필라테스가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카드를 긁지 못했던 이유는 가성비를 따지다가 나온 초라한 결과였습니다.

 배움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경험이 낯설기도 했습니다. 결국 돈에 끌려다닌 꼴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퇴사를 결정할 때도 경제적인 부분이 걱정되서 미루다가 정신적으로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 때와 비슷한 결과를 낼 뻔했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나 스스로를 위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저는 당장 운동을 등록했습니다.






 운동을 시작해보니 생각 외로 필라테스가 정말 잘 맞았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하루 1시간의 시간과 일정 금액의 강습료를 낸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었습니다.

 또 가성비를 생각하다보니 운동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건강한 음식을 찾고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부가적인 이점 덕분에 백수생활을 더욱 알차고 보람있게 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체력을 키워야하는데 체력을 키울 시간이 없는 슬픔의 루프를 어떻게 끊어내야하나 고민했는데 드디어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아마 체력이 생기면 예전과 똑같이 일해도 퇴근 후의 시간을 조금 더 활동적으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필라테스로 골반 쪽 근육을 강화시키면 생리통이나 생리전증후군에도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 저혈압과 숙면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하니 웬만한 병원보다 운동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현재에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라는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정작 스스로에게 시간과 돈을 쓰는 것에 인색한 편이었습니다. 제 수중에 무언가 남는 소비는 아니지만 분명 의미 있는 비용입니다.

 배움에 대한 비용에 가까워질수록 나를 위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첫 단추는 제대로 꿰어진 것 같습니다. 신체의 건강으로부터 파생될 삶의 활력과 미래에 대해 기대해 보고 싶습니다.


이전 11화 퇴사 절차는 누가 알려주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