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가 주는 적당한 거리감이라는 미덕

모두가 오래도록 자유롭고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적당한 개인주의

by moka

어떻게 하면 오래도록 평화롭게 함께 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인간관계는 새로 알게 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아는 사람과도 늘 좀 어렵다.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평생 고민하게 되는 인생의 과제 같다. 궁극적으로는 늘 적당한 거리감이 문제인 듯하다.


북유럽 사람들은 특히 퍼스널 스페이스가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넓은 편이다. 그러니까 버스 정류장 같은 데에서 사람들이 나란히 서 있을 때 간격이 굉장히 넓다. 친밀한 관계가 아닌 이상 걸어 다닐 때도 옆으로 떨어져서 걸어 다니고 이야기할 때도 사람들 간 간격이 넓다고 느껴질 정도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다.


그런데 나는 비단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거리뿐만이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서적 거리감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북유럽에 가기 전에 조심해야 할 사항을 찾아보면, 흔히 종교나 개인사에 대해서 너무 자세히 묻지 말라고 권고를 하곤 한다. 한국 사람들은 무심코 물어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프라이버시 침해처럼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퍼스널 스페이스는 비단 물리적 거리만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잊고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차가 있어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가기도 하고 그래서 다른 이는 이를 '오지랖'이라고 느끼며 이에 불편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흔히 사람들이 명절 스트레스라고 하며 명절 등이 괴롭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대부분 이 명절 스트레스는 명절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모이는 친척들이 걱정해준답시고 소위 말하는 '스펙'이라는 사회적 기준을 잣대로 평가를 하기 때문인 듯하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평가는 놀라울 정도로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심지어는 연봉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묻곤 한다.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서 어디 사는지, 부모님은 뭐하시는지 등 호구조사를 매우 당연하게 한다. 물어보면 거북하면서도 대답하지 않으면 무례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어리둥절하면서도 말하게 되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조금 누군가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거침없을 정도로 참견을 하는 일이 잦다. 그런 이들의 특징은 부드럽게 거절해도 '너를 위해 하는 말'이라며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와 더욱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럴 때 ‘적정선을 지켜주세요’ 하고 나와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어 달라고 하고 싶어 진다.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주로 낯 모르는 완벽한 타인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고 여겨질 만큼 아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평가를 하는 것도 기분 나쁘긴 하지만, 나름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믿어주지 않고 모진 말을 해서 마음을 다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따지고 보면 잘 모르는 사람보다 가깝다고 여기며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욱 상대를 몰아붙이며 괴롭히는 게 많다. 상대방이 거리감이 있고 어렵다고 느끼면 과연 그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에도 지켜야 할 선은 있다. 둘도 없이 가깝다고 해도 마음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알기 어려운 게 사람이다. ‘좀머 씨 이야기’에서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하루 종일 걷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좀머 씨처럼 타인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그리워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감이 있었으면 좋겠다. 함부로 타인의 감정이나 고통을 섣불리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상처를 주기보다 아무리 잘 알아도 좀 더 조심스럽기를 바란다.


타인의 입장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똑같은 일을 겪어보고 나서야 가능하다는 글을 보았다. 그런데 나는 같은 것을 겪어도 사람마다 그것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거나 살아가는 게 아니라 각자 자신만의 기준을 가진 개별자로 존재한다. 같은 것을 겪어도 어떤 사람이 느끼는 고통은 다른 사람의 몇 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입장에서 어떤 사람에게 왜 그만큼 강하지 못하냐고 다그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겐 폭력이 된다. 그 순간 그 사람에게 타인은 사르트르의 말처럼 지옥이 된다.


북유럽에서는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도 개인주의가 있다. 북유럽의 사회복지가 그렇게 발달한 것은 개인이 개인으로서 사는데 가장 자유롭게 살 수 있기 위해서이다. 부모님의 노후 등을 포함해서 장애가 있어도 가족 부양 등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사회복지 제도는 발달했다. 부모와 아이들은 유대감이 강하지만 한국과 같이 부모가 자녀들을 소유하는 개념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개별적인 인격체로 존중하며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접어들 때부터는 친구처럼 이성 교제에 대해서 상담을 해준다든지 한다.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자기 자식들이 애틋하지 않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 '오베라는 남자'로 유명한 스웨덴의 유명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베어타운' 등의 작품을 보면 부모들도 모두 아이들을 걱정한다. 하지만 본인도 그런 것을 경험해봤고 그들은 자기 자녀들이 언제든 상담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다. 그렇지만 독립된 인격체로 각자의 삶을 인정한다.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독립해서 자기 삶을 찾아 나선다. 어떤 삶을 선택하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들 중에도 좀 더 좋은 직업을 갖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있겠지만 한국처럼 자녀와 자기의 자아를 일체화시켜서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본다.


한국사회는 집단주의적 성향이 굉장히 강하다. 한국인들을 역사책에서 단군 건국 아래 얼추 43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한 민족이라고 늘 배워왔다. 그런 연장선에서 한국은 '우리는 하나다'라는 로고를 유독 좋아한다. 집단주의 사회의 특징은 타인과 자신을 묶어서 '하나'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나의 응집력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의 유사성을 기본으로 하다 보니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문제가 발생되기도 한다. 비교하며 다름을 줄이거나 없애고 하나의 같은 것이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정해놓고 그 지향점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게 유행하면 모두가 그것을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뒤쳐진 사람이 된다.


다시 말해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바람직하다고 정해놓은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에서 도태된다고 여긴다. 어딘가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생각하지 않고 일단 따라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오늘도 '아싸(아웃사이더)'가 되지 않고 '인싸(인사이더, 주류)'가 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타인을 걱정해준답시고 그것을 남에게도 강요한다. 그렇지만 원치 않는 오지랖은 폭력으로 느껴질 뿐이다,


현대사회의 문제가 개인주의라고 꼽고는 하지만 나는 오히려 한국 사회와 같은 지나친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개인주의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결여된 관심이 문제다. 개인주의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간섭이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타인을 '나와 다른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으로 여길 때, 그 사람은 독립된 개체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 굳이 나와 같지 않더라도 '다름'에 대해서 그 나름대로 존재함을 인정할 수 있다. '저 사람은 저 사람 나름의 사는/생각하는 방식이 있겠지.' 다름을 베이스로 깔면 서로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한다. 아니면 적어도 같지 않음에 대해서 문제로 시작하지 않는다. 마치 낯 모르는 외국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이 한국말을 쓰지 않는다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타인과 자신을 일체화시키지 않고 분리할 때, 우리는 각자 독립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서로의 다름에 대해 모두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더 이상 같음을 강요하지 않고도 우리는 공존할 수 있다.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소설집을 보면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혹은 연인으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들은 가깝다는 이유로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희생을 강요하고 혹은 잘 안다는 이유로 넘겨짚어 함부로 말하며 상처를 준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별난 인물이 아니라 어디서든 볼 법한, 누구든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한 감정들을 지닌 인물들이다. 그의 작품에서처럼 가족 내에서 부부싸움이든 형제자매간의 싸움이든 싸움 없는 집은 거의 없다. 부모 자식 간에는 싸움까지 가지 않더라도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뭐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경우를 흔히들 볼 수 있다. 내 배에서 나왔다고 하는 자식마저도 나와는 별개의 또 다른 하나의 인간이다. 혈연으로 연결은 되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유의 영역은 아니다. 자식 역시 마찬가지, 부모 자식 간에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무슨 말이나 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가깝기 때문에 더 상처 입기 쉽다. 그래서 가까울수록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 존중해야 한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단편소설을 보면 ‘앤’이라는 여자가 곧 생일이 돌아오는 아들의 생일 케이크를 빵집에 주문해놓는다. 그러나 생일 당일 날 아이는 뺑소니 사고를 당하게 되고, 의사가 별 것 아니니 금방 일어날 것이라고 했던 아이는 며칠 후 의사가 알아차리지 못한 병으로 죽는다. 앤과 그녀의 남편 하워드는 애꿎은 빵집에 가서 화풀이를 한다. 빵집 주인은 그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에게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대신 갓 구운 빵을 권한다. 그리고 그의 그런 행동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된다. 섣부른 참견보다는 오히려 곁에서 그저 말없이 있어주는 게 더 큰 위로가 되어준다.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사랑하되 속박하지 말고, 같이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있지 말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상대가 자유로울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계속 함께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이란 대부분이 자기중심적이라 상대를 자기의 입맛에 맞게 바꾸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상대방은 원하지도 않는 자기 의견을 강요하고 상대방을 옥죄게 된다. 내 방식이 옳다는, 조금은 나르시시스트적인 믿음은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오히려 낯 모르는 타인보다 더 상처 입힌다.


우리가 계속 함께 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너무 가까이 붙어서 있기보다 적당한 거리에서 떨어져서 조금은 타인의 눈으로 상대를 그저 바라보며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아닐까 싶다. 각자 있는 그대로, 설령 그게 꼭 내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니까 내가 참견할 부분이 아니고 괜찮다고 존중해주었으면 좋겠다. 상대가 떠나가게 만드는 원치 않는 참견이 아니라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다가올 수 있게 마음의 문을 열어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고 싶다.






퍼스널 스페이스 간격이 상당히 넓은 북유럽 사람들은 서로 상당히 떨어져 서있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keyword
이전 17화조깅 후, 맥주 한 모금- 작지만 확실한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