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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Apr 14. 2024

Y가 고요해지는 법

어제는 언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날이었다. 몇 주간 y로 인해 죽을 맛이었다. 그사이 Y가 다시 미워졌다. 이런 일이 있을 때 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명언을 상기하며 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Y는 정말로 그래왔으니까. 그런데 이번 만큼은 덜컥 겁이 나고 힘이 들었다. 그런 요즘이었다. 그러던 Y가 어제는 정말 달라진 모습으로 새초롬하니 자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집중력도 좋고 대체로 고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기회를 틈타 Y를 데리고 공원으로 데리고 갔다. 공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자 Y는 때를 부렸다. 아마도 또 걷기를 하게 될까봐서 그런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저쪽 벤치로 가서 젤리 먹으며 쉴까?” 말했더니 Y가 좋아라 벌떡 일어나 고분하게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습기를 잔뜩 품고 있는 무거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발 밑에서 구구구 노래를 하고 사박사박 걷는 비둘기도 볼 수 있었다. Y가 비둘기를 보며 순식간에 젤리를 다 먹어 치웠다. 그리곤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우리는 그렇게 한 자리에서 30분 정도의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Y에게는 한 자리에서 멍 때리면서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정말 힘이 드는 일이다. 그리고 Y는 절대 낮잠을 자는 법이 없다. 밤잠도 조금밖에 자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내 손으로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Y의 두 눈을 가려 보았다. 혹시 스르르 잠시 낮잠이라도 자게 될가해서. 이 고요하고 나른함이라면 잠시 꿈속에 다녀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러나 Y는 답답한지 내 손을 자꾸 치웠다. 나는 손가락 사이를 벌려 까꿍놀이를 하며 답답함을 잠시 풀어 주었다가 다시 눈을 가리는 행동을 반복했다. 눈이 보이면 안심을 했다가 가리면 불안해하는 Y를 볼 수 있었다. Y는 눈을 감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눈을 감는다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Y가 잠을 자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과 계속 연결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Y가 일어나려 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고요한 상태를 더 누리고 싶었다. Y를 안정시킬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이의 불룩한 배를 토닥토닥 거리며 “섬마을 아기”를 불러 주었다. 이 동요 만큼 마음을 평화롭고 잔잔하게 만드는 노래는 없을테니까.


“엄마가 섬 그늘에 굴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스르르 팔을 베고 잠이 듭니다.” 


돌봄이 필요한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본다니……. 아기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파도 소리에 의지한다. ‘섬마을 아기’는 이미 혼자 노는 법을, 혼자 있는 법을 터득해 버린, 이 아득한 외로움이 너무도 슬픈 노래인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면 멀쩡하던 사람도 슬픔의 바다 속으로 푹 잠겨 버리는 감정이 일게 된다. 동요가 이렇게 슬플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금새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이 일게 된다. 엄마와 바다가 이렇게 슬픈 단어인지 생각을 하게 된다.

Y는 늘 둥실둥실 떠다니는 아이이기 때문에, 난 평소 되도록 아이에게 느리거나 슬픈 단조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자동차에서는 요한 파헬벨의 캐논을 들려주곤 했는데 이 음악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면 들떠있던 아이가 슬퍼지는 눈빛으로 변하곤 했다.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서는 내 뒷통수만 뚫어지게 쏘아 보던 아이가 슬그머니 옆으로 고개를 돌려 차창 밖 풍경을 감상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련한 눈빛으로 흘러가는 거리의 풍경을 따라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자동차 와이퍼로 눈을 스윽스윽 밀어내며 유리창에 떨어지는 눈에 취해 운전을 했다. 때마침 USB 저장 파일에서(클래식이 300곡쯤 들어 있다. ) 파헬벨의 캐논이 나왔다. 눈처럼 뿌려지는 파헬벨의 캐논. 조지 윈스턴의 캐논변주곡으로 더 익숙했던 클래식. 너무 황홀하고 좋았다. 나는 우체국에 우편물을 부치고 사무실로 다시 오던 중이었다. 이 날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나의 ‘갑’들이 30명쯤 잔뜩 모이는 긴장되는 날. 그럼에도 나는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워놓고 차창밖으로 눈내리는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무실에 조금이라도 더 늦게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캐논을 반복해서 계속 들었다. 이상하고도 벅찬 슬픔이 하얀 눈을 타고 살랑살랑 밀려왔다. 내 기분이 점점 더 침잠 속으로 빠져들게 되면서 오히려 더 슬픈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울고 나면 개운해지는 것처럼. 슬픔에 슬픔을 더하면 더 행복해지는 그런 기분.

그후로 난 내 마음에 슬픔이 미적지근하게 쌓이려하면 슬픈 노래를 들으며 미적미적 거리는 슬픔들을 왈칵 쏟아버리려 노력한다. 그러면 오히려 금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누르지 않고 터트리는 힘, 감정은 터트려야 한다는 것. 슬프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 감정을 누른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슬픈 일이다. 그래서 슬픔은 더 진하고 깊은 슬픔을 섞어 희석시켜버려야 한다.

이럴 땐 아이가 마이너 음악을 좋아하는 나를 만나 참 다행이라 생각을 했다. 경험상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방법 중 우울하고 침잠한 음악을 듣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슬픔에 슬픔을 더한 깊은 슬픔은 사람의 마음의 갈증을 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 한참을 가라앉아 있는 음악을 들으며 슬픈 우울함에 잠겨있다보면 슬픔이 내 안에서 지루해하며 더 불안한 사람을 찾아 떠나간다.

Y의 음악치료 선생님도 차분한 음악을 권했다. Y는 흥분 상태를 잠재우기 위해서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처럼 일부러라도 테이프가 늘어진 것처럼 추우욱 늘어지는 노래를 Y에게 들려주는것은 각성 상태를 잠재우기 위한 꽤 괜찮은 방법일지 몰랐다. 우울을 불러 떠있는 감정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Y에게는 필요해 보였다.

Y는 좌충우돌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도 차분했다. 낮에 공원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나의 음악치료가 효과가 있었나? 생각하며 내가 요즘 빠져 듣고 있는 노래 ‘사랑하고 싶은 마음(L'Envie d'aimer)’을 Y에게 들려주었다. 프랑스의 싱어송라이터 다니엘레비가 프랑스 뮤지컬 십계에서 부른 명곡이다. 우리나라 뮤지컬 배우 고은성이 불러 화제가 된 곡.  y때문이 아니라 내가 더 깊은 슬픔에 빠져 있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너 사랑이 뭔지 아니?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완벽한 사랑 말고 아주 가장 밑바닥에 있는 하찮은 사랑, 연인들이 하는 가장 저급한 사랑 말이야.”

“.....”

“이 노래는 그 저급한 사랑을 말하는 노래가 아니야. 거룩한 사랑을 노래하지. 잘 들어봐.”

“......”

나는 장난을 치다가 그만 이 마이너 음율의 슬픔에 내가 빠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 눈물을 보고 Y가 당황을 한듯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민망함과 동시에 Y는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을 받아 마땅한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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