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주는 낯선 제주시 시외버스 터미널을 둘러보았다. 항상 공항에서 위미리 쪽으로 직행했으니 제주시 중심 시가지에 온 건 처음이었다. 희주는 버스터미널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재헌을 기다렸다. 제주시는 관광지라기보다는 일반 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육지와 별반 다를 거 없는 그런 식당 많은 골목.
20분쯤 기다리자 골목 저 너머에서 재헌이 걸어왔다. 머리와 온 몸을 툭툭 털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니 일하다 온 듯 했다.
‘그래도 첫 정식 데이트인데 옷은 좀 갈아입고 오지…’
제주에 와서 가장 공들여 화장을 하고 하늘하늘한 원피스까지 챙겨 입은 희주는 톱밥이 폴폴 날리는 옷을 입고 나타난 재헌을 보고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뾰로퉁하게 한마디 하려던 희주는 가까이 다가온 재헌의 팔과 다리에 빨갛게 긁힌 자국들을 보고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보니 빨간 자국 외에도 팔과 손에는 거친 상처들이 많았다. 튀어나온 게 힘줄인지 긁혀서 부어오른 상처인지 헷갈리는 손과 팔뚝을 보니 희주는 재헌이 안쓰러워졌다.
“가자, 고기 먹자.”
“너 어제도 고기 먹은 거 아냐? 바비큐 했다며.”
“그건 맞는데, 걸어오는 꼴을 보니 힘이 하나도 없어보이네. 고기 좀 먹여야 겠어.”
“힘? 지금 니가 내 앞에서 힘을 말해?”
재헌이 희주의 팔목을 휙 잡아 흔들며 말했다. 커다랗고 거친 재헌의 손에 잡힌 희주의 하얗고 가는 팔목이 덜렁덜렁 흔들렸다.
“힘만 줘도 부러지겠구만.”
“아, 암튼 몸보신 좀 하라구."
“뭐 고기 먹으면 나야 좋지.”
재헌은 자연스럽게 희주의 팔목을 놓고 손을 감싸 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희주의 가방을 받아 들고 골목으로 향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재헌의 행동을 보며 희주는 살며시 웃으며 따라갔다.
두 사람은 아주 낡고 오래된 삼겹살집을 갔고, 재헌은 삼겹살 3인분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가게가 너무 낡아서 의심하던 희주는 한 입 먹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랐다. 유명하다는 흑돼지 맛집에서 한시간 웨이팅해서 기다리고 먹었던 것보다 맛있다며 희주는 호들갑을 떨었고, 재헌은 그런 희주를 보며 또 피식 웃고서는 막걸리를 한껏 들이켰다. 흑돼지와 막걸리, 된장찌개와 냉면까지 실컷 먹은 후에야 두 사람은 재헌의 새로운 집으로 향했다.
“오, 컨테이너보다 훨씬 크네?”
아까 그 가게보다 더 낡은 건물이 있다니, 희주는 속으로 내심 놀랐다. 아주 오래된 건물이라 곳곳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흔적들이 보이긴 했지만 재헌의 새로운 집은 목공 용품들을 다 늘어놓고도 침실이 나올 만큼 넓었다. 하지만 구조나 바닥이 집이 아니라 공방이나 사무실로 쓰이던 공간인 듯 했다.
희주는 톱밥 가루들 사이에서 기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는 목공용품들이 쌓인 공간을 지나 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목공실 한쪽에 나무 판넬로 대충 가벽과 문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재헌의 방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창가 쪽에는 낡은 냉장고와 싱크대가, 그 옆에는 옷장이, 반대 편에는 혼자 자기엔 꽤 커보이는 침대가 덩그러니 있었다. 희주는 이 방에서야 숨을 크게 내쉬고서는 방을 둘러보고서 침대 끄트머리에 살짝 앉았고, 재헌은 냉장고를 열며 말했다.
“줄 거라고는 막걸리밖에 없는데. 한잔 더 할래?”
“또? 막걸리밖에 안마시고 살아?”
“뭐, 거의 그렇긴 하지.”
그러고 보면 재헌과 만날 때는 늘 술이 있었다. 희주는 이 인간 혹시 알코올 중독인가 싶다가도 술이 있어야 그나마 재헌이 말을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헌이 막걸리와 잔을 챙겼다. 그리고 상을 하나 펴서 바닥에 놓았고 희주도 맞은편에 앉았다. 재헌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받으며 희주가 슬쩍 물었다.
“어제는 … 뭐 했어?”
“어제? 일했지.”
“토요일 저녁인데도 일해?”
“요새 제주도에서 젤 바쁜 직업이 누군지 아나? 목수, 미장이, 노가다 뛰는 놈들이다. 개나 소나 다 제주 내려와서 산다고 하면서 맨날 때려부수고 새로 짓고 하니까 젤 바쁘지.”
어설픈 의심은 하지 않은 척 희주는 맞네,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 곳곳에 있는 가구들도 직접 만든 건지 물어보며 조금씩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느새 바깥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낡은 창문 너머로 빗방울이 튕기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작은 웅얼거림은 삼킬 정도가 되었을 때 희주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내밀었다.
“메밀꽃 폈다는 연락, 왜 보냈어?”
“왜 보내긴. 폈으니까 폈다고 보냈지.”
“그 전에는 아무 연락 없다가 갑자기? 그걸?”
“그 전에는 할 말이 없었고, 메밀꽃 피니까 할 말이 생겼고.”
“왜 할 말이 없어, 내가 말도 없이 서울로 그냥 올라갔었는데 어떻게 아무 연락도 안 해?”
“니는 왜 말도 없이 올라갔는데. 니도 말 한마디 없이 올라갔는데 내가 뭐하러.”
무슨 말꼬리 잡기 싸움도 아니고, 알맹이 없는 말다툼에 희주는 입을 다물었다. 말하는 족족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도 짜증났다. 빙빙 돌리는 질문이 아니라 진짜 궁금한 것에 대해서 물어봐야 하는데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진짜라고 대답하면 어떡하지.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여자들과 놀았던 게 한두번이 아니고 나도 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대답하면, 이 집을 박차고 뛰어나가기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쿨한 척 나도 그렇다면 웃어 넘겨야 하나, 희주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왜? 내 연락 많이 기다렸나?”
그런 희주를 쳐다보던 재헌이 능글맞게 웃으며 또다시 툭, 던졌다. 뭐라고 대답할까, 1초의 순간 희주는 수많은 대답 후보들을 생각하다 말했다.
“어. 기다렸어.”
희주의 말에 이번엔 재헌이 멈칫 했다. 여기서 더 빙빙 돌려 대답 하다가는 이 관계는 아무런 진척이 없을 것 같아서 희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차마 눈을 보며 말하지는 못해서 대답을 하는 동시에 막걸리 잔을 들어 마시는 척 슬쩍 얼굴을 가렸다.
“내가 그렇게 올라갔는데 궁금하지도 않나, 왜 연락을 안하나. 기다렸지.”
태풍이 오는 걸까,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점차 빗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 집은 컨테이너보다 잘못 지은 집 같았다. 빗소리가 이 정도로 잘 들리면 다른 방음은 되긴 하는 건지, 쏟아지는 빗소리는 이제 희주의 목소리보다도 크게 들리는 듯 했다. 재헌은 그런 소리 사이에 희주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건지 못들은 건지 막걸리 잔을 들고 크게 들이켰다.
“원래 나 핸드폰 잘 안 봐. 일할 때는 톱밥 날려서 화면 엉망이고 소리는 들리지도 않으니까. 따로 빼놓고 일하고 끝날 때까지 안 봐. ”
“일 안 할 때는?”
“술 먹느라 안보지.”
“알콜 중독이야?”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또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희주는 재헌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연락 못한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준 게 희주의 마음을 풀었다. 그 이후로는 좀 더 부드러운 이야기들이 오갔고, 두 사람은 막걸리를 세 병쯤 마시고 나서야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운 후 재헌의 손이 자연스럽게 희주의 티셔츠 안으로 파고들었고, 희주가 그의 손을 두 번쯤 빼냈지만 결국 두 사람은 관계를 한번 했고, 재헌은 그 이후 바로 잠이 들었다. 하지만 희주는 침대에 누워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거세지는 태풍은 마치 이 낡은 집의 창문을 뜯어버릴 기세였다. TV에서만 보던 야외 취침이 이런 기분일까 하며 희주는 몸을 뒤척였다. 침대 매트리스는 얼마나 오래 된 건지 가운데가 푹 꺼져 희주가 몸을 어떻게 돌려도 불편했다.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희주는 열 번쯤 몸을 뒤척였지만 재헌은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다.
희주는 재헌에게 비치지 않게 조심하며 핸드폰을 켰다. 날씨 어플도 들어가보고, 제주 국제공항 사이트에 들어가서 혹시 비행 취소 알람이 떴는지도 보고, SNS 도 했다. 한참을 둘러보던 희주가 이러다간 한 숨도 못 자겠다 싶어 핸드폰을 끄려던 그 때 재헌의 핸드폰이 반짝 하고 켜졌다.
'남의 핸드폰은 보면 안되는데.'
이성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희주의 1.0의 시력이 재헌의 핸드폰 위에 뜬 것이 메시지라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이 시간에 도대체 누가 메시지를 보냈을까, 이성보다 호기심이 커졌다. 반짝이던 핸드폰 화면이 꺼지자 희주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고, 재헌은 그런 희주의 움직임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여전히 대차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보지 말라는 생각과, 궁금하다는 생각과, 잠이 온다는 생각과, 내일 아침엔 어떻게 하지, 하는 갖가지 생각이 희주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뛰어다녔다. 핸드폰과 재헌을 번갈아 바라보던 희주는 슬쩍 재헌의 핸드폰을 눌렀다. 그냥 누가 보냈는지만 확인해야지 하고 킨 건데 메시지 잠금 같은 것도 해놓지 않은 이 남자의 핸드폰은 첫 화면에서 메시지를 고스란히 희주에게 노출했다.
[지니 : 오늘은 집에서 자?]
희주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핸드폰을 되돌려 놓고서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눈을 질끈 감았다. 쿠과과광 쏟아지는 소음이 희주의 머리를 갉아먹는 듯 했다. 창 밖에는 모든 것을 부숴버릴 듯한 소음이,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소란한 말들이 희주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여자였다. 여자가 확실했다.
오늘은 집에서 자냐니, 무슨 의미일까. 다른 날은 저 여자 집에서 잤던걸까.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일 수도 있지. 위미리에 자주 갔었으니까 오늘은 위미리인지 집인지 물어본 거일 수도 있지. 일을 부탁하는 거일 수도 있고.
“그럴리가 있냐?”
희주는 뒤집어쓴 이불을 팍 내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대차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재헌을 돌아보았다. 소음에 잠도 자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세상 걱정 없는 듯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심통이 났다.
'확 가버릴까. 이번에도 그냥 가버리면 어떻게 될까? 이 사람이 또 나를 찾을까, 아니면 끝일까? 이 남자는 나를 진짜 어떻게, 아니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까 제대로 물어봤어야 하는데... 그런데 물어본다고 이 남자가 대답을 했을까? 아니, 오히려 별로 생각 안한다고 대답했으면 어떡하지. '
끝이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희주는 힘을 주어 눈을 꼭 감은 채 이불을 다시 뒤집어썼다. 희주가 침대에 눕자 잠결인지 재헌이 희주 쪽으로 몸을 돌려 희주의 어깨를 껴안고 툭툭 만져 주었다. 눈도 뜨지 않은 채 토닥토닥이라니 귀신 같은 놈, 알 수 없는 놈, 희주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재헌 쪽으로 몸을 돌려 그를 안았다. 재헌의 손이 희주를 더욱 세게 끌어당겼고 희주는 그에게로 파고들어 뒤척이다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거짓말처럼 쨍쨍해진 제주 하늘을 보며 재헌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