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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육지와 바다

by 재완 Mar 14. 2025

희주가 잠 못 들던 밤과 달리 그 날 이후 두사람의 관계는 장거리 연애를 하는 여느 커플과 같았다. 


재헌은 일을 하러 가기 전 희주에게 연락이 잘 되지 않을 거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메시지가 오는 시간은 주로 새벽이었고, 밤 늦게나 일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가끔은 다음날 연락이 올 때도 있었지만 재헌은 주말에도 거의 일했고 쉬는 날이 별로 없었기에 희주는 그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렸다. 제주시와 위미리는 꽤 멀어서 재헌은 더 이상 게스트하우스에도 가지 못했다. 희주는 매일 쉬지 못하고 일하는 재헌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오늘도 늦게 끝났네. 

-아, 오늘 서귀포까지 갔다왔다. 운전만 세시간을 했네. 

-오늘은 뭐 한건데?

-오늘도 뭐 펜션이지. 침대랑 테이블 들어갈 공간 보고, 짜고.


가끔 재헌은 일이 일찍 끝나면 희주에게 전화를 했다. 희주는 침대에 앉아 통화로 재헌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재헌은 매일 똑 같은 일이라며 이야기 하기를 쑥스러워 했지만 희주는 한번도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일을 하는 재헌이 신기했다. 매일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는 일이라니, 힘들지만 낭만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회색 사무실 파티션 안에서 노트북 키보드만 두드리는 희주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 


-그럼 오빠는 토목과를 나온 거야?

-나 대학 안 나왔는데. 고졸이다.


희주는 순간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기 너머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세상에도 대학을 안가는 사람이 있구나, 희주의 주변엔 모두 다 비슷한 학교를 나온 사람들 뿐이었기에 희주는 재헌의 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닌 좋은 대학 나왔지?

-나? 아, 뭐...

-어딘데? 설마 서울대?

-아… 맞긴 한데.

-어쩐지! 니 하는 얘기는 잘 못 알아듣겠더라.  


그럴 줄 알았다며 재헌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 희주는 웃지 못하고 있었다. 희주에게 남자가 ‘좋은 학교 나왔네’ 라고 말할 때는 대체로 결과가 좋지 않았다.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학벌이 좋은 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남자들은 혼자 열등감에 휩싸이다가 떠나곤 했다. 


재헌은 어떤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한 걸까, 비웃는 걸까 진심인걸까.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희주는 그 대화 이후 자신의 학교와 회사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재헌 역시 목수 일 외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주로 재헌이 지은 펜션에 대한 일, 오늘 먹은 점심 메뉴, 저녁 메뉴 등만 이야기했다. 


“야, 타!” 

“풋, 이게 뭐야!” 


희주는 격주로 주말마다 제주도에 내려갔고 더 이상 다른 숙박을 잡지 않고 재헌의 집으로 향했다. 그 즈음 재헌은 차를 트럭으로 바꾸었다. 가구 이송을 할 일이 많이 생겨 먼지 쌓인 SUV로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희주를 데리러 공항에 트럭을 타고 왔을 때 희주는 트럭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거 어떻게 타는 거야?” 

“그 옆에 손잡이 잡고 올라타. 높아서 그냥 못 올라온다.” 


세상에 제주도에서 트럭을 타보다니, 심지어 이걸 타고 데이트를 하다니. 상상해본 적도 없는 상황에 희주는 황당하면서도 계속 웃음이 났다. 재헌은 그런 희주를 보며 왜 자꾸 웃냐고 타박했지만 희주가 웃는 모습이 좋은 지 같이 웃었다. 트럭은 엉덩이 쿠션이 없어서 방지턱을 지날 때 마다 희주는 놀이기구를 타듯 몸이 들썩 거렸다. 


“제주도에 카트 타는 데 많잖아.” 

“갑자기 뭔 카트?” 

“그거 타는 기분이야. 제주도에 와서 놀이기구도 타고 1석 2조네!” 

“놀리냐?” 


트럭 창문 위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잡고서 말하는 희주를 보며 재헌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트럭의 달리는 속도가 천천히 줄어드는 것을 보며 희주는 재헌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고, 재헌도 다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혼자서 잘 놀고 있어라. 내 없다고 울지 말고.” 

“뭐래, 얼른 가서 돈 많이 벌어와!” 


재헌은 희주를 집 앞에 내려놓고서는 다시 일을 하러 갔고, 희주는 자연스럽게 재헌의 집 안에 짐을 놓고서는 혼자 제주 관광을 하러 다녔다. 희주는 혼자 바다를 보거나, 카페를 가거나, 미술관을 다니다 재헌이 일을 마칠 때쯤 알아서 재헌의 집으로 들어갔다. 


가끔 재헌이 희주를 데리고 일터에 갈 때도 있었다. 완공 직전의 펜션이나 집들을 보며 설명을 해줄 때 만큼은 재헌은 말이 아주 많았다. 이 집은 어떤 목재를 썼고, 어떤 분위기를 내고 싶어했고, 바다에 위치한 집과 중산간에 위치한 집은 어떻게 달라야 하고, 가장 공을 들인 가구는 어떤 거고, 등등. 희주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이었지만 그 말을 할 때의 재헌은 눈이 반짝 거리고 있었기에 희주는 화려한 리액션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오빠도 나중에 바닷가 앞에 집 지을거야?" 

"아니? 제주도 사람들은 바닷가 앞에 안살아. 외지인이나 살지. 바닷가 앞에 살면 가구랑 차 다 망가진다." 

"오빠 제주도 사람 아니잖아, 내려온 지 몇년 안됐다며." 

"계속 제주도에서 살 거니까 제주도 사람이야." 

"난 바닷가 앞 집이 좋은데." 

"육지 사람 뭘 모르네." 


희주의 말에 재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희주도 재헌의 제스츄어를 따라하며 같이 고개를 흔들었다. 재헌은 그런 희주를 귀엽다는 듯이 보다가 겉 옷을 벗어 희주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재헌의 옷에서는 늘 나무 냄새가 났다. 향수와는 다른 진짜 나무의 냄새가 무뚝뚝하게 거칠면서도 따뜻하게 안아주는 재헌과 닮았다고 희주는 생각했다. 


재헌의 집은 요리를 하기엔 좋은 공간은 아니었던지라 늘 밖에서 저녁을 먹었다. 재헌과 함께 가는 집은 대부분이 오래된 노포였는데 하나같이 맛있고, 막걸리와 잘 어울렸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재헌과 함께 제주시의 노포를 즐기다보면 가끔 희주는 스스로가 제주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럼 언젠가 재헌과 함께 제주에서 정말 사는 날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잘 그려지지는 않았다. 


*톡!

“메시지 오는데 … 안 봐?” 

“일이면 전화 하겠지.” 


평범한 커플처럼 놀다가도 재헌의 핸드폰이 울리면 희주는 온 신경이 그 곳으로 향하곤 했다. 자신이 앞에 있어서 그런지, 거짓말이 아닌 건지 재헌은 정말 핸드폰을 잘 보지 않았다. 시간이 비면 늘 목공방에서 뭔가를 만들거나 오늘처럼 방에서 TV를 보고는 했다. 오히려 핸드폰 알람에 반응하는 건 늘 희주였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이 보일까, 슬쩍 쳐다보다가도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여자 이름이라도 보이면 어떡하나 하고 바로 시선을 돌려버리곤 했다.  


"위미리 게스트 하우스 안간 지.. 꽤 됐지?" 


이번에도 핸드폰 쪽을 보다 억지로 재헌에게 시선을 돌린 희주가 물었다. 재헌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치. 니 만나러 갔을 때, 그 때가 마지막이었을 걸." 


나를 만나고 그 이후로 안갔다니, 희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슬그머니 웃었다. 괜시리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 이렇게 일만 하고 게스트하우스도 안가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희주는 재헌의 엉덩이를 통통 쳐주며 기쁨을 표현했다. 


"아, 아니다. 지난주에 한번 갔네." 

"뭐? 왜?"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하는 재헌의 목소리에 희주의 손이 멈췄다. 웃고 있던 희주의 표정이 굳었다는 걸 모르는 지 재헌은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누구 좀 태워주느라고. 제주시 사는 앤데 거기 간다고 태워달라고 연락해서 오랜만에 갔지. 가서 막걸리도 마시고 그래서 하루 자고 왔어." 


버스도 많은데 굳이 그 불편한 트럭을 태워달라고 했다고? 희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다시 되물었다. 


"제주시 사는 애 누구?" 

"누군지 말하면 뭐 니가 아나?" 

"그런 건 아니지만!" 

"니 지금 뭐, 질투하나?" 


그제야 재헌이 희주를 돌아보았다. 뾰로퉁한 얼굴의 희주를 보며 재헌은 귀엽다는 듯 웃었고 양 손으로 희주의 볼을 잡고 흔들었다. 


"질투아니고 그냥 호기심. 오빠 친구들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니까 궁금해서 그렇지." 

"친구 아니고 그냥 아는 애. 그냥 동네 아는 애다." 


양 손으로 희주의 볼을 잡고 놀던 재헌이 희주의 뾰로퉁한 입에 키스를 했다. 쪽. 한번 하고서는 다시 깊게 키스가 시작되었고 볼을 잡고 있던 재헌의 손은 희주의 허리로 내려가고, 등을 받치며 슬쩍 희주를 눕히기 시작했다. 


"아, 오늘 피곤한데 ..." 

"빨리 끝내줄게." 

"거짓말." 

"거짓말 맞아." 


침대에 누운 채 희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재헌이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다시 희주의 입술에 키스하며 한 손을 희주의 등 뒤로 넣어 버클을 풀렀다. 희주도 양 팔로 재헌의 목을 안고 키스를 하며 그의 티셔츠를 벗겼고 잔 상처가 많은 재헌의 몸이 드러났다. 희주는 그의 몸을 만지며 그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듣고 싶던 대답은 못들었지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어쨌거나 지금 두사람은 평범한 롱디 커플이고 별다른 문제가 없으니까. 굳이 더 물어보고 짚어 낼 이유가 없다고 희주는 생각했다. 


“하나도 안 평범해 보이는데.” 


제주에서 올라오자마자 희주는 선영을 집 근처 호프집으로 불러냈다. ‘별 거 아니긴 한데’ 로 시작하고서는 삼십분쯤 계속 된 희주의 말을 들으며 선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맥주를 탁, 내려 놓았다. 소시지를 자르고 있던 희주의 얼굴에 맥주가 몇 방울 튀었고, 희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선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선영은 여전히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희주에게 말했다. 


“서로 믿고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뭐가 평범한 커플이야.” 

“아냐, 다 믿어. 그냥 그 여자애 하나만 … 궁금할 뿐인 거지.” 

“뭐 좀 알아봤어? 몇 살인 줄 알고 그 여자애래.” 

“지니라는 이름이 우리보다 나이 많은 언니는 아닐 거 같잖아.”

“알 수 없지. 돈 많은 누님이신지.” 


콱 씨, 희주는 소시지를 자르던 칼을 들고 선영을 노려보았다. 선영은 입모양으로 취소, 라고 말하고서는 희주가 자르던 소시지 하나를 포크로 쿡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기름이 좔좔 흐르는 소시지가 입 안에서 톡 하고 터지며 육즙이 입안 가득 찼다. 희주의 눈치를 보며 입안 가득 소시지를 오물오물 씹던 선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좀 속 시원하게 물어보면 안돼? 아니 내가 아는 이희주 맞아? 지난 번에 연락 안 할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유독 그 사람 앞에서만 왜 이렇게 안하고 피하는 게 많아? 너 연애할 때 그런 스타일 아니었잖아. 꼬실 때도 자신감 넘치고, 할 말 다 하는 그런 사람 아니었어?” 

“예상이 안돼.” 


기껏 소시지를 다 잘라놓고 옆에 놓인 뻥튀기를 먹으며 희주가 답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은 대체로 어떤 행동을 할 지, 어떤 말을 할 지 예상이 됐거든. 내가 뭘 물어보면 거짓말이라도 이렇게 하겠지, 진짜면 이렇게 하겠지. 이 상황에선 어떻게 하겠지, 사과는 이렇게 하겠지. 그런데 그 사람은 예상이 안돼. 내가 그 여자에 대해 물어봤을 때 도대체 어떻게 대답할 지 예상이 안돼. 맞다고 대답할까? 아니라고 웃고 넘길까? 아무 말도 안할까?” 


희주는 노란색 뻥튀기를 집었다가, 초록색 뻥튀기를 집었다가, 빨간색 뻥튀기를 집었다가 내려놓으며 말했다. 눈 앞에 보이는 뻥튀기는 색깔대로 골라 잡을 수 있는데 박재헌은 무슨 색인지 모르겠다. 어떤 색인지, 어떤 말을 할 지,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전혀 예상이 안된다. 그리고 박재헌의 반응에 따른 자신의 마음도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 


"선 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적당히 만나다 정리해. 처음 만나보는 스타일 신기하고 호기심 가서 계속 만나는 건 알겠는데, 20대도 아니고 그런 만남 오래 가져서 뭐해." 


오락가락한 희주의 마음을 조용히 듣고 있던 선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의 연애에 왈가왈부 하는 애가 아닌데, 선영이 정말 희주를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걸 희주는 알았다. 무엇보다 호기심이라는 단어가 희주의 마음을 쿡 찔렀다. 


호기심, 새로움, 신기함. 그 얄팍함들이 재헌에 대한 희주의 마음의 시작이었다는 걸 희주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얄팍함은 언제든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나도 알아, 그냥 ... 만나는 거야. 어차피 오래 안 갈 거니까..." 


희주는 선영에게 웃어보이며 맥주 잔을 들었고, 선영은 그런 희주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다 잔을 부딪히고는 쭈욱 들이켰다. 쭉 들이킨 맥주의 끝 맛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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