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라면 무조건, 증빙이 필수

니가 잘못했냐 내가 잘못했냐 따져보자!!

by 재완

광고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 썼던 보고서는 뭘까. 계약서도 많이 썼고, 문과생인 나 답지 않게 광고 수익을 따지는 엑셀 파일도 정말 많이 만들었으며, PPT 자료 정리는 정말 수백, 수천장씩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많이 했던 건 ‘회의록’ 이다.



광고대행사는 회의를 정말 많이한다. 내부적으로도 많이 하지만, 다양한 광고주와도 수많은 회의를 한다. 중요한 이야기만 하고 끝나는 회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아이디어나 방향성에 대한 논의들이기 때문에 회의록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직장인의 세계에서 니가 말했니 내가 말했니가 정말 얼마나 중요한가.



회의록은 결국 증빙이다. 너는 이런 말을 했고,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이 것에 합의를 했고, 이런 식으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증빙. 물론 그 증빙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는 경우도 많다. 회의를 대체 왜 한건지 그 회의와 아무 상관없는 결과물이 나오는 일도 허다하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내가 잘못하지 않았음’을 누군가는 알아 줄 수 있는 증빙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여러 사람들과 일하다보니 전화로 이야기를 할 때도 많았는데, 그럴때마다 꼭 마지막 말은 “지금 이야기 나눈 부분 메일로 보내드릴게요/보내주세요” 였다. 우리 사이엔 증빙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많은 것들을 기록하고 회의록을 남기고 메일로 남겼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빈틈은 있다. 어디선가 생겨난 빈틈이 문제점을 만드는 순간, 어디에 책임을 물어야하는가가 굉장히 중요해진다. 그게 내부 문제가 아닌 다른 회사가 엮인 얘기라면 더더욱.


광고업계는 모델에이젼시라고하는 회사가 별도로 있고, 광고대행사는 모델에이젼시를 통해서 모델들의 광고비용을 체크하고, 스케쥴을 잡는다. 그때의 나는 아직도 믿음직하지 않은 사원 나부랭이였고, 모델에이젼시에서 10년이상 뼈가 굵은 실장님과 사무실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 모델 스케쥴을 잡으면서 꼬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광고 일정도 꼬이게 생긴 마당이었고, 둘 중 누가 먼저 커뮤니케이션을 잘못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서 서로가 슬쩍 슬쩍 떠보면서 긴장감 타는 대화 중이었다.


‘일단 메일로 보내달라구해’


나의 통화가 답답했던지, 사수가 옆에서 메모를 적어서 보여줬다. 일단 메일로 그들에게서 상황을 전달받고, 우리는 그걸 통보받았다는 식으로 광고주에게 넘기자는 말이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나도 내가 살고 봐야했다. 메일로 보내달라고 해봤지만, 모델에이젼시의 실장님도 이미 사회인 10년차, 쉽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 다 말씀드렸잖아요. 왜 메일로 똑같은 말을 또 보내요?”


그렇다. 이미 나는 너무 구구절절 들은 상황이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할지 모르고 우물쭈물하자 또 옆에서 사수가 글을 적어 보여줬다. ‘너 지금 회사에 없다고 해’


“아, 제가 지금 회사가 아니라 딴 데 있어서요, 계속 통화도 어렵고, 저희 차장님께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거 같아요. 메일로 좀 부탁드릴게요”

“그래요? 일단 알겠어요. ”


나름 단호한 내 목소리를 들은 모델 에이젼시 실장님은 약간 찜찜한 목소리와 함께 알겠다고 하고는 핸드폰을 끊었다. 내 사수는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야~~하며 고생했다고 나를 토닥여주었고, 나도 뭔가 해낸 듯한(?) 느낌에 안도감을 느끼며 의자에 푹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돌리자마자, 사무실 자리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네, 00기획 재완입니다
자리에 계시네요?

전화기 너머로 방금까지 핸드폰으로 통화했던 실장님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순간 등골이 서늘하며 모든 털이 삐죽 서는 느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전화. 너무 당황한 채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은 채 머리속이 하얘졌다.


“바... 방금 들어왔어요!! 뛰어들어왔어요!!!”


아, 망했다. 유선 전화기 너머로 그녀가 나를 비웃고 있는게 느껴졌다. 내 얄팍한 수가 다 드러났고, 나는 그녀보다 아직 한참 아래인 것이 명확하게 증명되었다. 수화기 너머 그녀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은채 엄청 빠르네~ 하더니, 불쌍한 이 적선 하듯 “메일 쓸게요” 하고는 전화를 바로 끊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야, 핸드폰으로 전화기 연결해놨다고 했어야지!!!”


그 상황을 그대로 다 지켜본 사수가 안타까워하며 소리를 질렀다. 맞다.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이 냉혹한 직장인의 야생 세계에서 나는 아직도 쪼렙 사원 나부랭이로 노련하고 맹수같은 실장님에게에 잡아 먹힌 기분이었다. 굴릴 머리도 없는 주제에 머리를 굴리는 내가 불쌍해서 메일을 써주겠다고 한 그녀 앞에 나는 참패 당했다. 그날 이후로 어설픈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또 쪽팔리게 일을 만드느니, 솔직하게 말하고 요청을 하는 게 속이 더 편하다!!


keyword
이전 06화시간 약속은 칼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