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회사생활을 도운건지 망친건지 모르겠다
나는 회사 연수원과 참 맞지 않았다. 4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2번의 인연이 있었는데 두번 다 무사히 그 곳을 나오지 못했다. 한번은 대리진급 시험에서, 또 한번은 신입사원 연수를 받을 때였다.
(대리진급 시험 에피소드는 먼저 출간 된 <퇴근 후엔 전화하지 마세요> E-book 에피소드 '진급시험 족보의 함정'편에 나온다)
인턴을 하다 바로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던 나는 한참 일하던 중간에 신입사원 연수를 받으러 들어갔다. 신입사원 교육은 2주간 진행되는 일정이었고 산 속 깊은 곳에 별도로 마련된 연수원에서 ‘갇혀’ 들어야 했다. 약 700여명이 2주간 한 곳에 모여서 기업의 역사를 배우고, 회계도 배우고, 우정도 배우고, 사랑도 배우며 진정한 그룹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그것이 신입사원 교육이었다. 사람이 많다보니 고등학교 처럼 반을 나누고, 반 내에서도 조를 나누어 교육을 들었다. 같은 조 사람들과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업을 같이 붙어서 들었기에 친해지는 게 가장 중요했다.
자고로 20대 후반의 젊은 남녀들이 모여 우정도 배우고 사랑도 배우려면 ‘술’이 있어야 한다. 술이 없이 친구를 사귀던 중고등학생 시절은 이미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멀고, 첫 인사를 사발식으로 대신하는 대학교가 바로 앞 기억인 신입 직장인들에게는 24시간 붙어있는 이 친구들과 진정으로 친해지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왜인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으나 교육을 받는 기간에는 술을 마실 수 없는 규칙이 있었고, 당연히 연수원 매점에서는 술을 팔지 않았다. 사실, 친목을 다질 시간도 별로 없긴 했다. 쉴새없이 몰아치는 교육과 과제에 친목은 커녕 자고 일어나기도 바빴지만 그럴 수록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 이미 마음은 10년차인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아마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을 일이겠지만 내가 교육을 받으러 갔던 그 때, 하필이면, 어쩔 수 없이 연수원이 내부 공사를 했다. 정말 하필이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1주일은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남은 1주일은 방학 중이던 대학교 기숙사를 빌려 교육을 진행해야했다. 그리고 마치 신의 장난처럼, 하필이면 교육 장소 이동을 한 첫 날 우리는 체육대회를 했고, 체육대회가 끝난 후 저녁으로는 치킨과 콜라가 나왔다. 오늘은 과제도 없으니 마음껏 먹고 푹 쉬라는 말과 함께. 치킨에 콜라라니, 흥이 날리가 있나. 적당히 먹고 숙소로 돌아와 쉬고 있을 때 같은 조 동기에게서 연락이 왔다.
치맥 콜?
그렇다. 마치 신의 장난처럼 어쩔 수 없이 하필이면 우리가 이동한 대학교 기숙사는, 매점이 지하에 있었고 ‘맥주’를 팔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치킨이 있고, 맥주를 눈 앞에서 팔고 있으며, 연수원 담당자들은 오늘 하루 푹 쉬라고 했다. 이건 그냥 술을 마시라는 거다, 교육의 반이 지나간 지금 한번쯤 놀 때가 되었지 하고 눈 감아주겠다는 거다!!
700여명 중에 500명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연락 온 동기의 방으로 가는 길에 모든 방문이 닫혀있지만 닫힌 문에서 이미 흥과 술기운이 퍼져나오고 있었고, 우리 방 문을 열자마자 그곳에서도 이미 얼큰하게 취한 동기들이 보였다. 직장인의 친목, 회식의 현장이었다.
술이 들어가니 그간 쌓였던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나처럼 이미 입사해서 일을 하다가 온 사람들도 있었고, 아직 입사 전인 사람들도 있었다. 먼저 회사를 다닌 사람들이 무용담처럼 회사 이야기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며 힘들었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들도 하고. 술이 들어가니 자연스럽고도 편안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쯤 술이 다 떨어졌고 술과 함께 용기가 오른 남자 동기 두명이 술과 안주를 더 사러 가겠다고 일어섰다.
“매점 문 닫았을걸?”
“캠퍼스 밖으로 나가서 사오면 되지”
겨우 일주일이긴 하지만 금지되어있던 술을 마셔서일까.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취했고, 생각보다 빨리 이성적 판단이 흐려졌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밖으로 나가겠다는 그 두사람을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야심차게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이 방에서 술 마신 사람들
지금 당장 다 강당으로 뛰어갑니다. 실시
교육 담당자가 우리 방문을 두드리며 그 말을 했을 때, 사실 나는 장롱안에 있었다. 여자들은 지키겠다며 숨으라는 동기들 말에 숨은건데, 어디서 본 건 있는데 완벽하게 숙지 하지는 못해서 멍청하게 신발을 그대로 현관에 둬서 걸렸다. 다같이 강당으로 불려가자 우리 방에서 술 마신 11명만 모여있었다. 분명이 이 건물 통째로 500명쯤은 술을 마시고 있었을 텐데, 우리방만 딱 걸린 거였다. 11명을 모두 체크한 담당자는 다음날 아침 다시 모든 짐을 싸서 강당으로 모이라는 말을 하고 해산시켰다. 모든 짐을 싸서... 에이, 설마.
다음날 아침, 각자 캐리어를 들고 다시 강당으로 모였다. 설마, 하는 마음과 함께. 이건 그냥 겁주는 거겠지. 사실 20대 후반의 성인이 술을 먹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혼나는 게 정말 이해가 안되지만 정해진 규칙을 어겼으니 이 정도 겁은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를 우르르 버스에 태울 때도, 아 좀 과하게 겁을 주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버스가 정말 출발해서 우리를 기차역으로 데려다줬을 때 아무도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버스가 돌아서 다시 기숙사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모두 회사로 다시 돌아가야했다. 진짜 퇴소 당한것이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니, 정말 이렇게 내쫓는다고? 이게 장난이 아니라 진짜라고?? 그때쯤 각자 회사에서 연락을 받기 시작했고 몇명은 엄청나게 혼이 나는 듯 했다. 전화기를 붙잡고 계속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동기도 있었고, 그 자리에서 정말로 ‘퇴사’ 통보를 받은 동기도 있었다. (다행히 바로 재입사 처리는 되었다. 하지만 퇴사 처리도 명백하게 당했다) 그리고 나는,
야, 너 술먹고 쫓겨났다며??
역시 광고 회사 사람이면 그 정도는 되야지!!!
칭찬을 받았다. 광고인이라면 이 정도 또라이성은 보여야 한다며. 그리고 다음날 출근한 내 책상 위에는 화려한 플랜카드와 함께, 치킨과 맥주가 올려져 있었다.
A4 한장 한장에 정성스럽게 출력한 플랜카드가 책상 전체를 휘두르고 있었다. 쪽팔림에 어색하게 웃으며 플랜카드를 떼고, 맥주와 치킨을 치우고 서랍을 열자, 서랍 안에서도 맥주가 나왔다. 전화기를 들자 전화기에도 치킨 사진이 붙어있었고, 내 자리 수십 곳곳에 치킨 사진과 맥주가 숨겨져 있었다. 다들 일도 많을텐데 굳이 이런걸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만들고 숨겼네. 다들 어제 한가했나. 내가 진짜 또라이들이 많은 광고회사를 다니긴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에 나 역시도 웃음이 났다. 다행히 나는 별다른 처분은 받지 않았다. 대신 한동안 술먹고 쫏겨난 신입과 술 한번 먹어보자는 수많은 선배들의 부름에 모든 술자리에 불려다녀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사건은 마무리 되는 듯 했다.
나 교육 갔다가 너 봤어
그 다음 차수 교육을 갔다온 동기를 시작으로, 모든 교육을 다녀온 사람들이 다 나를 연수원에서봤다고 이야기 하며 소문은 다시 시작됐다. 연수원 내 규칙 위반 사례로 나와 10명의 동지들이 사진 교육 자료로 등장한 것이다. 내가 다시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 마저도 그 자료가 나왔고, 모두가 나를 ‘니가 그 애...?!’ 라는 표정으로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이미 회사에서도 너무 많은 놀림을 받은지라 그 정도 곁눈질은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빨리 더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서 내 사건이 묻혔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퇴사할 때까지 교육을 듣고 오는 모든 회사 사람들에게 그 소리를 한번씩 들어야 했다. 퇴사한지 꽤 지난 지금도 나오고 있을지는 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