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의 특권 ‘보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면 아무 일도 없었을텐데

by 재완

사원일 때는 빨리 승진하고 싶었다. 광고라는 게 워낙 변수가 많은 일이니만큼, 내가 내 스케쥴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관리를 못하는 것도 싫었고, 무엇을 하든 일일이 보고하고 컨펌받고 진행해야하는 것도 싫었다. 때로는 ‘이 정도는 니가 알아서 해’라고 하는 것들도 있었으나, 알아서 했다가 또 한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일이 무엇인지도 결국 물어보고 해야하는, 주체적이지 못한 내가 싫어서 빨리 승진하고 싶었다. 물론 연봉도 높이고 싶었고.



연차가 쌓이고 승진을 한다는 건 권한이 주어지는 만큼 책임도 주어진다는 건데, 어릴 땐 그걸 모르고 빨리 ‘대리’, ‘과장’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대리를 지나 과장이 된 지금은 사원이었던 때가 가장 좋았지, 라는 생각이 든다. 뭐든지 일일이 보고하고 시키는 것만 해도 되는, 편안한 사원이었던 때가. 내 꿈은 계속 승진하지 않고 할미대리로 회사에 계속 붙어있는 거였는데, 야속하게도 연차는 계속 오르고, 어찌저찌 승진도 계속 하고 있다. 아쉽다.




책임도 없고, 권한도 없는 사원에게는 마법의 멘트가 있다. ‘보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특히나 대행사에서 일을 한다면 클라이언트의 말도 안되는 요구가 종종 있기도 하고 (이번 건은 돈 받지 말고 해달라고 한다거나) 스케쥴을 억지로 조정해달라고 하는 등의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보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윗선으로 일을 넘기는 게 가장 좋다. 사원은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는 걸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마법의 멘트를 잊고 큰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때는 사원 말년차, 나는 대리 승진을 앞두고 있었고 곧 대리라는 뿌듯함, 나도 이제 일 좀 할만큼 해봤다는 애매한 자신감이 차있는 시기였다. 당시 나는 전자회사의 세탁기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광고주가 '모든 가전제품을 다 모은 종합 지면 광고'를 집행하겠다고 했다. 워낙 지면이 많다보니 에어컨 팀에서 에어컨 광고 1페이지, 정수기팀에서 정수기 광고 1페이지 씩 기간 내에 준비해서 주면, 막내인 내가 한번에 취합해서 소재를 넘기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고, 내 담당인 세탁기 지면광고를 준비하며 야근 하던 그 때, 광고주의 전화가 왔다.



“재완씨, 세탁기 광고 준비하고 있죠? 우리 냉장고 광고도 하나 같이 만들어줘요”

“냉장고라면 ... 저희 회사가 아니라 다른 대행사가* 담당하고 있지 않나요?”

“네, 그렇긴 한데 – 세탁기 하면서 그냥 한 페이지 더 만들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타 대행사의 일을 맡기고, 마치 뚝딱 하면 광고가 나오듯이 말하는 광고주의 말에 순간 욕이 나올 뻔 했다. 하지만 나는 곧 대리가 될 여자 ... 프로답게 대응해야했다.


“그쪽 대행사랑은 이야기해보신건가요?
거기서도 이렇게 진행하는 건 기분 나쁠 거에요.
그 쪽이 담당인데 제대로 전달 받- ”
“지금 하기 싫다는 거에요?”


당연히 하기 싫다는 말이지. 내가 담당하는 일도 아닐 뿐더러, 같은 회사 다른 팀 일도 아닌, 타 회사의 일이다. 내가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름 침착하게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광고주는 기분이 상한 듯, 빈정거리며 묻기 시작했고, 그 이후는 아니다, 하기 싫다는 거네, 그게 아니라, 아, 됐어요, 와 같은 말이 반복되다 통화가 끊어졌다. 예의없는 태도에 정말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내 스스로 업무 정리를 잘 했다며, 다독이고 있을 때였다.


“재완, 너 차과장이랑 무슨 일 있었어? 지금 상무님 전화오고 난리 났어. ”


하지만, 어이없게도 30분도 되지 않아 그 기분은 바로 무너졌다. 나와 실갱이를 벌인 광고주가 바로 우리 회사 상무님에게 전화를 걸어 컴플레인을 건 것이다. 지금 그 회사에 대행 맡긴 게 몇 갠데 이 정도도 못해주겠다고 사원 나부랭이가 버티냐고. 당시의 나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 지 알 수 없었다. 자초지종을 모두 사수에게 말해보았지만, 사수 역시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그럴 땐 무조건 윗선에 보고하고 말씀드리겠다 해야지.
그게 니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인데.


지금도 내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처능력이 부족한 건 확실했다. 그 당시에는 서운했지만 지금 들으면 백번 천번 맞는 사수의 말. 그 말 그대로만 대답하고, 전화를 끊고, 사수에게 넘기기만 했었어도 그 이후에 내게 일어났던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상무님에게 불려가서 다시 한번 사건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한숨을 크게 쉰 상무님과 함께 다음날, 광고주 회사로 찾아가서 사과를 했다. 사원나부랭이가 제대로 파악도 못한채 대답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실 이 사건은 내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때 나와 같이 간 상무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던 분 중 한분이었는데, 어린 나는 상무님이 멋있게 광고주 앞에서 ‘내 직원은 잘못하지 않았다. 그 쪽에서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다’ 라고 정리를 해줄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무님은 ‘재완, 니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일단 가서 사과하자’ 라고 말했고, 나와 함께 가서 사과를 했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이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승진한 나의 미래’라고 생각했고, 어설픈 오만함과 함께 그렇게 되기는 싫다는 마음에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과장 나부랭이이지만 그래도 회사를 10년 넘게 다니고 나니 그때의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했는지 알게 되었다. 상무님이 내 편을 들어주었다면 분명 멋있었겠지만 그로인해 같이 일하는 다른 사람들이 괴로웠을 것이다. 그 광고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상무가 사원을 데리고 함께 사과를 해주는 일 조차도 흔치 않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그 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내가 과연 상무가 되어 그 위치에 선다고 해도 어떤 선택을 할 지 잘 모르겠다. 나는 어린 내가 실망하지 않을 선택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연차가 쌓이고 승진을 하고, 책임은 늘어나는데 어떤 게 옳은 선택인지 여전히 난 헷갈린다. 할미대리는 지나갔고, 할미과장으로만 영원히 남고 싶다.



*당시 내가 다닌 회사가 그 광고주의 대부분의 전자제품 광고를 담당하고 있긴 했으나, 공정거래법에 의해 일정 비율 이상은 타 대행사가 가져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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