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대신 퇴사를 하던 그 날

퇴사는 여러번 했다고 해서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by 재완
나만 퇴근 못 했어?
아니, 나도 있어.


<퇴근 후엔 전화하지 마세요>를 쓰면서 예전 광고 회사 동기들과 주고받았던 메시지들을 쭉 한번 살펴봤는데, 위의 두 대화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건 ‘술 먹자’. 그렇게 새벽까지 일하고도 꼬박꼬박 술을 먹고 들어갔던 강철 체력의 시절이었다. 체력도 술도 약한 편은 아닌데, 동기 중에 내가 제일 먼저 퇴사했다.


상무님과 함께 광고주에게 가서 사과를 하고, 일주일에 110시간씩 일하고, 지방에서 엄마가 올라오셨는데도 회사 전화를 받고 뛰쳐나가 출근한 후*, 몇달 뒤에 나는 퇴사했다. 퇴사하는 달에도 나는 매주 주말 출근을 했고, 두 개의 경쟁 PT에 참여했으며 매일 야근했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사람들에게 인사를 돌리고, 퇴직서에 사인을 받았다. 계속 퇴사가 실감 나지 않았는데, 퇴직서와 사원증까지 제출하고 나니 실감이 났다. 회사 문은 보안상 문제로 사원증이나 지문인식을 통해서만 열 수 있었는데, 퇴사자인 나는 이제 회사 문을 열 수 없었다. 그제야 ‘아, 나 이 회사 소속이 아니구나.’하는 실감이 났다.



마지막으로 회사를 나와 퇴근길을 걷는데 마음이 묘했다. 허탈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이직처를 결정하고 그만뒀던 게 아니고 무작정 그만뒀던 거라, 마음 한쪽엔 불안감도 있었다. 퇴사하고 4개월 정도까지도 새 직장을 구하지 못했을 때는 꽤 후회했다. 그래도 그만한 직장이 없었는데 괜히 그만뒀나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동기 카톡방에서 ‘여전히 회사에서 벌어지는 어이없는 사건들’을 듣거나 회사에서 오는 전화를 받으면 그 마음이 싹 사라지곤 했다. 인수인계서에 다 써 놓은 내용인데, 백업 폴더에 다 넣어놨는데…. 퇴사하고 3년 정도까지 전화를 받은 것 같다.



하지만 퇴사 이후의 전화가 다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백수 5개월 차쯤 퇴사한 회사에서 온 전화를 받고 나는 새 회사를 소개받았고, 백수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이제 정말 닥치는대로 모든 회사에 이력서를 넣어야하나 고민할 때 쯤이었기에 최선을 다해 면접 준비를 했었다. 새로 들어간 회사는 연봉은 낮았지만 바쁠 땐 바쁘고, 안 바쁠 땐 여유로운 워라밸이 좋은 회사였다. 물론 바쁜 것과 상관없이 여전히 퇴근 후에 전화는 울렸고, 카톡은 끊임없이 쌓였으며 근본부터 이해되지 않는 또라이들을 만났다. 새로 이직한 곳은 단순한 오피스 회사가 아니라 영화 투자배급사이다 보니 그동안 내가 겪은 회사생활이란 무엇인가, 이 업계에서 말하는 진정한 일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하는 곳이었다.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하게 만든 새 직장에서의 이야기, 아니 직장인의 설움을 지금부터 풀어보겠다.


*<퇴근 후엔 전화하지마세요>의 에피소드 '일주일에 110시간 근무 가능합니까', '주말 출근은 퇴사를 싣고' 편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keyword
이전 09화사원의 특권 ‘보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