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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Dec 02. 2022

제주, 한잔 : 플레이스캠프에서 혼자 마신 레드락

풀떼기와 맥주를 마시는 건 예의가 아니지

작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쉬는 기간, 나는 제주 플레이스캠프 1인실에서 일주일간 지냈다.


예전의 나였다면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를 잡았을 것이다. 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 하는 걸 좋아했다. 서울에서는 일과 관련된 사람들, 비슷한 업계의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데 반해 여행지에서는 상상도 못한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낯선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건 내게 좋은 자극이 되었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됐다.


음, 사실은 그냥 노는 게 좋아서 갔다. 매일 마시고, 매일 취해도 괜찮은 사람은 여행자뿐이고, 그런 사람이 가득한 곳이 게스트하우스니까. 제주 핑크 막걸리 하나면 처음 보는 사람과도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고 친해질 수 있었고, 거기에 누군가 기타라도 치면 모르는 사람 열명이 모여있어도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퇴사 여행에는 플레이스 캠프를 선택했다. 퇴사 후 홀가분한 마음만큼이나 고민도 많았기에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1인 여행자를 위한 호스텔로 유명한 이 곳을 골랐다. 체크인을 하고 카드키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니 ‘왜 이곳에는 무조건 혼자 여행자만 와야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딱 혼자서만 쓰기 좋은 싱글침대와, 캐리어도 펼치기 힘들만큼 좁은 공간, 그리고 반투명 유리문이 달린 욕실까지. 먼저 와 본 친구가 커플끼리는 절대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하더니, 유리문 너머로 변기가 훤히 보였다. 정말 오롯이 혼자 조용히 지내야 하는 곳이군.


좁은 바닥에 대충 캐리어를 펼쳐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플레이스 캠프는 1인 여행자를 위한 곳 답게 내부에 몇개의 식당과 카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나도 그 안에서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광장으로 내려갔다. 체크인할 때 받은 레드락 1잔 무료 쿠폰을 들고 스피닝울프 펍으로 향했다.


평일이라 그런가 펍 내부는 한산했다. 텅텅빈 테이블 사이에 앉아 메뉴를 흝어봤다. 혼자 여행자를 위한 숙소인데, 펍 메뉴는 별로 혼자 여행자를 배려하지 않은 구성이었다. 피자 한판도 치킨 한마리도 모두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 보였다. 결국 샐러드 하나를 시키고, 레드락 쿠폰을 내밀었다.


붉은 빛의 레드락 맥주가 먼저 나왔다. 엠버라거 특유의 고소한 맛과 함께 레드락이 꿀떡꿀떡 넘어갔다. 하지만 같이 먹는 게 풀떼기라니 … 맥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이 펍도 혼자 여행자를 위한 예의가 있는 펍은 아니었기에 뭘 더 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게스트하우스였다면 새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이것저것 메뉴를 시켰을텐데, 오늘의 나는 오롯이 혼자. 뭘 더 시키기엔 별로 내키지 않아, 맥주를 원샷하고 펍을 나왔다. 그리고 바로 뒤에 위치한 편의점으로 가서 캔맥주와 치킨 대신 닭다리 과자를 사와 플레이스 캠프 광장 벤치에 앉았다. 이미 광장에는 나같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제 맥주 마시는 맛 나네


똑같이 혼자인데, 힙한 분위기의 펍에서 마시는 레드락보다 광장에 철푸덕 앉아 마시는 2500원짜리 캔맥주가 훨씬 맛있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저 사람은 왜 혼자 왔을까, 저 사람은 오늘 혼자 어떤 여행을 했을까, 저 사람은 안주로 저걸 사왔네 등등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 홀로 말을 걸고 상상했다. 혼자 마시고 있지만 혼자인 사람이 가득해 혼자가 아닌 기분.


스피닝울프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렇게 한참을 광장 바닥에 앉아 캔맥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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