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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Dec 03. 2022

제주, 한잔 : 송당리 술의 식물원에서 마신 한 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놓은 공간. 

나는 제주 바다를 정말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건 에메랄드빛 세화 바다이지만, 맑고 밝은 빛의 표선 해수욕장도, 파랗다 못해 검게 보이는 짙은 서귀포 바다도, 세화 못지않게 옥빛을 자랑하는 금능바다도 모두 사랑한다. 그래서 나의 제주 여행은 무조건 바다를 중심으로 돈다. 


가끔 운전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가면 오름도 오르고 사려니 숲길도 걷고, 곶자왈도 가긴 하지만 혼자 오면 무조건 바닷가 근처를 떠나지 않는다. 버스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하면 정처없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거나, 동네에 갇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바다 근처를 떠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퇴사 여행이니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북적거리는 곳보다는 조용한 곳에서 생각을 좀 하고 싶었다. 성산에서 버스를 타고 조용히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있을까, 노선도를 보며 고민하다 보니 송당리가 보였다. 


송당리는 몇 년 전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의 차를 얻어타고 한번 가본 적 있는 동네였다. 그때의 송당리는 관광객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가게도 별로 없던 조용한 동네라, 한창 시끌벅적하게 놀던 나와는 맞지 않았다. 30분 정도 동네를 둘러보고는 볼게 없네, 하고 차를 다시 얻어타 해안가로 나왔다. 


그랬던 송당리를 몇 년만에 다시 버스를 타고 찾았다. 다시 찾은 송당리는 여전히 관광객은 적은 동네였지만 카페와 빵집, 다양한 가게들은 많이 생겼다. 파란색, 주황색 지붕 너머 새파란 바다가 보이는 바닷가 근처의 마을과는 다르게 송당리 마을은 뽀얀 아이보리에 군데군데 색을 칠한 느낌이었다. 6월의 짙푸른 녹음들이 시원하게, 새로 생긴 가게의 파스텔톤 지붕들이 부드럽게 마을에 색을 더하고 있었다. 바닷가 마을을 걸을 땐 시원한 느낌이 드는데, 송당리 마을을 걸으니 마음이 몽글몽글 부드러워졌다. 


워낙 작은 마을인지라 30분 정도 산책하자 다 돌아다닌 것 같았다. 돌아다니며 어디를 들어갈까, 가게들을 유심히 봤던 나는 그 중에서 미리 마음 속에서 골라놨던 곳으로 들어갔다. 가게 이름은 술의 식물원. 이름부터 너무 마음에 드는 가게였다. 


가게 안은 술의 식물원이라는 이름답게 곳곳에 식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게 천장에 닿을만큼 큰 화분부터 테이블과 창문가 근처의 작은 화분까지. 다양한 화분들을 바라보며 맥파이 맥주 한잔을 시켰다. 밥을 잔뜩 먹고 온 이후라 안주는 간단하게 올리브 절임을 시켰다. 손바닥보다 작은 접시에 올리브 절임이 나왔다. 배부르면 맥주 못마시니까 조금씩 먹으면 되지 뭐. 맥주를 마시고 초록색 올리브를 반 잘라 먹었다. 짭쪼름한 맛에 다시 맥주를 연달아 마셨다. 


가게 안에는 나 말고 한 커플이 있었다. 조용한 가게 분위기에 맞춰 커플은 소근소근 대화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도 커다란 화분이 천장에 닿을만한 크기로 늘어져 있었다. 초록색 잎 사이로 커플이 살짝 살짝 보이면서 마치 그들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예뻐보였다.  


그들을 한번 보고, 가게를 한번 보고 맥주를 한모금 마시며 언젠가 제주에서 가게를 한다면 이렇게 하고싶다, 생각했다. 너무 크지 않은 크기,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찬 공간, 대단하진 않지만 술 맛을 돋궈주는 간단한 안주들. 과음하지 않고 조곤조곤 좋아하는 사람과 즐길 수 있는 분위기. 

 

술의 식물원은 막연히 내가 생각만 하던 것을 실제로 펼쳐놓은 것 같은 공간이었다. 사장님과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사장님은 내가 꿈꾸기만 하던 것을 이룬 대단한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아마도 송당리가 아닌 바닷가 근처에 가게를 차릴 것 같지만. 마음 속으로 사장님에 대한 찬양을 하며, 버스 시간을 확인한 후 나는 맥주 한잔을 더 시켰다. 언젠가 내가 이런 가게에서 주문을 받는 모습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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