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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Nov 21. 2022

제주, 한잔 : 퇴사 후 멜맥집에서 마신 빅웨이브

제주 관광객 모드 해제, 이주민 모드 가동은 언제쯤 가능할까 

예전부터 알던 동생이 제주시에 게스트하우스를 차렸다. 내가 아는 그는 분명 서울에서 모든 사람이 아는 대기업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제주로 내려가더니 게스트하우스를 차렸다. 


처음 동호회에서 만났을 때 그는 취준생이었다. 여타의 취준생과 마찬가지로 수십, 수백개의 이력서를 쓰고 면접준비를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그의 취업 고민도 종종 들어주곤 했는데, 그때의 그는 정말 평범한 취준생이었다. 앞으로 내 사업을 할 것이다, 라던가 제주도에 내려가서 사는 게 꿈이라던가, 그런 말은 전혀 없었는데. 에어비앤비를 부업처럼 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하려고 한다는 건 알았지만 갑자기 제주에서 6층짜리 게스트하우스를 하다니?  


도대체 무엇이 그를 갑자기 그렇게 만들었을까. 너무 궁금했지만 한동안 나는 그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 보다는 내가 제주시에 숙박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인으로서 짧게 휴가를 내고 제주도에 놀러가는데 굳이 육지와 비슷한 제주시에 묵고 싶지가 않았고, 그러다보니 항상 제주 공항에 내리자마자 일주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달려가기가 일쑤였다. 동문시장 근처 산지천에 위치한 그의 게스트하우스는 내 동선에는 겹치지 않았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리고 2021년 여름, 나는 드디어 그의 게스트하우스에 묵게 되었다. 더이상 나는 직장인이 아니었기에, 제주시에서 1박 쯤은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 그 때의 나는 7년 다닌 회사를 퇴사한 상태였다. 모든 퇴사인이 그렇듯 나 역시 드디어 퇴사다! 라는 짜릿한 기쁨과, 그래서 앞으로 뭘 어쩌고 산단 말인가, 하는 어렴풋한 불안감이 같이 있는 상태였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나온 퇴사이긴 하지만, 애증이 가득한 직장이자 일이었기에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서 더욱 그와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퇴사 후 제주에서 살기, 라는 나의 로망을 뚝딱, 실천해버린 그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가 하는 게스트하우스 1층에는 가게가 있다. 낮에는 브런치를 파는 카페로, 저녁에는 맥주와 튀김을 파는 펍으로 운영하는데, 그 펍에서 파는 멜튀김을 그는 늘 자랑했다. 제주말로 멸치를 멜이라고 하는데 이건 정말 우리가 흔히 아는 멸치가 아니라며, 최고의 맥주 안주라며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던 그 멜튀김을 드디어 먹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멜맥집에 생맥주는 없어서, 고민하다 빅웨이브 맥주를 시켰다. 제주시는 삭막해서 싫다고 했었는데, 멜맥집 앞에는 산지천이 아름답게 뻗어있었다. 바다 대신 산지천과, 푸른 파도의 빅웨이브와, 멜튀김을 먹으니, 해안가 숙소 못지 않았다. 특히나 멜튀김은 진짜 멸치답지 않은 크기를 자랑했고, 바삭하면서도 짭쪼름한 것이 빅 웨이브의 부드러우면서도 쌉싸름한 맛과 잘 어울렸다. 그러니까, 그게 너무 잘어울렸다. 


빅웨이브 한병 더!! 나 오늘 퇴직금 들어왔어!!


분명 그의 사업 시작인 에어비앤비와, 게스트하우스 2호점과,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할지를 이야기 했었는데 하나도 기억 나질 않는다. 그저 기억 나는 건 빅웨이브를 끊임없이 시키고, 튀김도 끊임없이 나왔다는 것 정도. 가게에 있는 빅웨이브를 다 먹은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것 정도. 숙소에서 가장 좋은 산지천 뷰의 6층 방을 받았지만 숙취와 함께 일어나 그 뷰는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것 정도. 동문시장에 있는 식당에서 갈치국으로 해장을 하고 난 이후에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지난 밤 이야기했던 것들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건 멜튀김의 짭쪼름한 맛 뿐. 


주섬주섬 짐을 챙겨 버스를 타러가며 생각했다. 제주 이주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기억도 못하고 술과 안주만 기억나는 걸 보니 나는 아직 때가 아닌가보다. 숙취에 시달리며 버스 타기가 괴로우면서도, 그 버스가 향하는 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화바닷가라는 사실이 또 즐거웠다. 어떻게 하면 제주에서 살 수 있나 궁금해하면서도 결국 관광객 모드를 해제하지 못했고, 관광객 모드가 아직 즐겁다. 이주민 준비 모드는 조금만 더 뒤로 미루기로 하고, 흥얼거리며 나는 세화 바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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