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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Nov 09. 2022

제주, 한잔 : 남친몰래 성산일출봉에서 마신 막걸리

내게 제주 하면 떠오르는 술은 단연 핑크 막걸리다.

나에게 있어 제주 하면 떠오르는 술은 단연 핑크 막걸리다. 한라산 소주도, 땅콩막걸리도 아닌 핑크색 라벨이 인상적인 유산균 막걸리. 그 새콤하면서도 깔끔한 맛은 언제 어디서 먹어도 맛있지만, 가장 좋은 건 역시 제주 바다 앞에서 마실 때다.  


스물 아홉살에서 서른이 되던 날에 친구와 첫 제주 여행을 했다. 말을 잃게 만드는 예쁜 에메랄드 빛 바다부터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나는 첫 여행부터 제주에 푹 빠졌고, 그 이후 혼자서도 자주 제주에 내려와 여행을 했다.


운전을 하지 못하는 나는 혼자 오면 늘 버스 정류장에서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곤 한다. 지금은 익숙해져 깊숙한 곳 숨어있는 숙소에 가기도 하지만, 초반에는 무조건 버스정류장에서 가까운 번화한 곳에 있는 숙소를 잡곤 했다. 그리고 세번째 혼자 제주 여행에서 찾은 숙소는 성산일출봉 바로 아래에 있는 남친몰래 게스트하우스였다.


그러니까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남친몰래 게스트하우스'이다. 당시 나는 남친도 없었는데 왜 그 게스트하우스를 골랐을까. 세번째라고 그새 익숙해진 101번 버스를 타고 성산일출봉 입구에서 내렸다. 달달달달 캐리어를 끌고 성산 수협을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꺾으니 그 집이 보였다. 보라색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기타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같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노는 듯 했다. 낯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것에 살짝 긴장이 되어 심호흡을 한번 하고 미닫이문을 살짝 열자, 거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가장 문 가까이에 앉아있던 언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가 재완이구나? 어서와~


나에게 언제 제주에 그렇게 풍덩 빠졌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나는 주저없이 그 순간을 이야기할 것이다. 


마치 친척 언니네 집에 놀러온 듯 나를 반기는 목소리에, 나는 순간 내가 이 사람들과 원래 알던사이였나, 생각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날 예약 손님이 2명 밖에 없어서 이름을 외울 수 밖에 없었다며 언니는 이야기했지만,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던 그 목소리는 내가 도착하는 순간부터 나를 녹여버렸다.


남친 몰래 게스트 하우스. 언니는 그냥 재밌어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실제로 남친 몰래 오는 여자손님들이 많이 오는지 물어보는 남자 손님도 많다고했다. 그렇게 묻는 순간 예약 거부를 하곤 했지만. 많은 게스트하우스들이 그렇듯이 남친몰래 게스트하우스도 마당에서 바비큐를 하고, 숙소 안에서 술을 먹었었는데 날씨가 좋고 기분이 좋은 날이면 나가는 곳이 있었다.


“여기 진짜 좋은데가 있지, 돗자리 들고 따라와.”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서 성산 취락구조 정류장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이는 올레길 1코스가 나타난다. 그 풀밭 앞에는 쉰다리를 파는 가게 하나만 덜렁 있었는데 그 마저도 밤에는 문을 닫으니,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풀밭이었다.  


그 풀밭에서 우리는 돗자리를 깔고, 저 멀리 보이는 우도불빛, 성산일출봉 불빛 하나에 의지해 막걸리를 마셨다. 핑크색 막걸리 라벨이 별빛에 반사되어 옅은 빛을 내고, 막걸리잔에 막걸리를 부으면 그게 또 달빛에 반사되어 하나의 불빛이 되었다. 이상하게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는 꼭 기타치는 사람이 한명씩 있는데, 그때도 역시나 있었다. 막걸리를 따르고, 한잔 마시면 그가 기타를 치며 음악을 깔아주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막걸리를 받아 그의 기타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 이게 청춘인가’


그 이후로 나는 계속 남친이 없었음에도 남친몰래 게스트하우스를 쭉 다녔다. 언니가 더 이상 게스트하우스를 하지 않을 때까지. 함께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얼큰하게 취해서 다같이 올레길 1코스로 가서 또 성산일출봉을 구경했다. 그 앞에 서서 성산일출봉을 보며 차가운 공기를 크게 마시면 술이 깨고, 숙취가 사라지며 다시 또 새롭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계속 이 사람들과 함께 쭉 술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친 몰래 게스트하우스는 지금은 없다. 언니는 1년 정도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접었고 그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얼마 전 제주에 다시 내려갔다 오랜만에 올레길 1코스로 올라갔다. 쉰다리를 팔던 가게 하나 있던 그 길목에 지금은 까페와 고깃집과 가게가 가득했다. 밤이 되어도 가게의 불빛이 가득하고, 가로등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 가게에서도 핑크 제주막걸리를 팔겠지만, 그 가게에서도  성산일출봉과 우도의 불빛이 보일테지만 분명 그 맛은 나지 않겠지.


아무것도 없어도 즐길 수 있는 게 있었는데, 가게로 가득한 그 길을 걸으며 조금은 씁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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