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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Dec 10. 2022

제주, 한잔 : 오랜 친구와 성산 윤활에서 마신 와인

낮에는 카페, 밤에는 바로 운영되는 윤활 

30대 초반, 제주에 푹 빠져 있을 시기의 나는 거의 한달에 한번씩 제주를 찾았다. 직장인이라 주말 비행기 값이 꽤 부담스러웠지만 이미 제주에 빠질 대로 빠진 뒤라 왕복 20만원의 비행기도 거리낌없이 끊곤 했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말했던 남친몰래 게스트하우스를 단연 많이 갔었는데, 친절한 주인 언니도 좋았지만 그곳에서 성산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 더욱 자주 갔었다.  


하지만 주인 언니가 게스트하우스를 접은 이후 갈 곳이 없어지자 자연스레 제주로 가는 횟수가 줄었고, 사람들과 연락도 뜸해졌다. 그렇게 어영부영 몇 년이 흐르고, 간간히 SNS로만 볼 뿐 연락은 끊긴 채 몇년이 흘렀다. 


그리고 작년 퇴사 여행으로 플레이스 캠프에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성산에 왔으니 남친몰래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언니와 친구가 떠올랐지만  연락을 안한지가 벌써 몇 년이라 머뭇거려졌다. 갑자기 연락했는데 날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도 있어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만 며칠이 흘렀고, 혼자 여행을 하고 성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꽤 많이 걸은 날이라 나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버스를 타자마자 뒤로도 가지 못한 채 맨 앞자리에 털썩 앉았는데, 앉자마자 카톡 알람이 울렸다. 


‘재완, 혹시 제주야?’ 


몇 년만에, 성산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에게 톡이 온 것이다. SNS 에 올린 사진을 보고 연락했나보다, 나는 하지 못한 연락을 먼저 해준 그녀가 너무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응! 나 제주 놀러왔어.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전송 버튼을 누르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찰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재완아- 여기야" 


갑자기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바로 내 뒤에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몇 년만에 뜬금없이 버스에서 만나다니!! 나와 그녀는 서로 놀라워하며 눈이 동그래졌고, 바로 그녀의 옆자리로 옮겼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몇 년만에 버스에서 만나지?


그녀와 나는 신기하다를 연발하며, 버스 안에서 짧게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남친몰래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언니까지 셋이 다시 모였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성산에 살고 있었고, 몇 년간 연락하지 않고 지냈던 공백이 무색하게 우리는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옛날 이야기부터 요즘 사는 이야기까지, 제주의 삶과 서울의 삶이 오갔다. 왜 먼저 연락하기를 두려워했을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편한 자리였다.  



그리고 올해 회사에서 좋은 기회가 생겨서 2주간 제주에 내려와 있었다. 마침 회사에서 제공해준 숙소도 성산이라 바로 친구에게 연락했다. 나 이번에 제주에 2주간 내려가있으니 만나자고. 작년의 만남 이후 1년만의 연락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어떤 머뭇거림도, 두려움도 없었다. 


우리는 이번에도 성산에 셋이 모여 고기를 구워먹었다. 흑돼지 대신 냉장삼겹살을 실컷 구워먹고, 볶음밥까지 마무리 한 후 친구가 2차를 제안했다. 1차는 흔한 걸 먹었으니 2차는 좀 괜찮은 곳을 가보자며, 우리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성산의 밤길을 걸었다. 도착한 곳은 낮에는 카페로, 저녁에는 바로 운영하는 윤활이라는 곳이었다.  


윤활은 성당을 개조한 곳으로, 고풍스러우면서도 따뜻한 분위기 속에 윤활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바이크 소품들이 재미를 주고 있었다. 예수님이 걸려있었을 자리에는 오토바이 사진이, 신부님이 서있었을 자리에는 케이크와 와인 냉장고가,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을 창문 아래에는 위스키들이 가득 있었다. 나는 와인을, 친구는 칵테일을, 차를 가져온 언니는 커피를 골랐다. 각자 편안하게 자기가 고른 것들을 마시며 다시 수다를 이어갔다. 


언니는 올해 성산을 떠나 서귀포로 이사를 했고, 친구는 일하는 가게가 장사가 잘되어서 바쁘지만 힘들다는 말과, 나는 1년 사이 이직을 2번이나 해서 회사 욕을 두배로 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작년에도, 또 일년만에 만난 올해도 어색하거나 불편한 건 없었다. 성당과 바이크가, 커피와 위스키가 뒤섞인 것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끊임없이 퐁퐁퐁퐁 나왔다. 그리고 즐거웠다. 


그날 언니의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온 이후 다시 우리의 단톡방은 조용해졌다. 아마도 또 1년은 조용하겠지.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더라도 이젠 거리낌없이 연락할 수 있다. 연락의 횟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 제주든 서울이든 만날 수만 있다면 아무때나 뜬금없이 다시 단톡방은 울릴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 한잔과 함께 옛 이야기가, 지금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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