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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Dec 15. 2022

제주, 한잔 : 세화 제주한잔에서 마신 어린 막걸리

한창 어리고 예뻤던 31살의 나, 그리고 그녀 

제주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사람 만나는 재미에 푹 빠졌던 30대 초반, 나는 잠깐 거짓말을 하며 여행을 했던 적이 있다.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중심으로 다니다보니 20대들이 많았는데 그 안에서 내가 31살이라는 말을 하기가 너무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31살은 정말 어리고 예쁜 나이인데, 갓 서른이 넘은 주제에 30대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도 20대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 나이 말 안하고 싶다라는 철없는 자격지심에 27살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여행을 했었다. 



처음엔 충동적으로 한번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엔 나름 철저하게 ‘올해 27살이면 몇학번이고, 무슨 띠더라’ 라는 것까지 계산하며 거짓말을 했다. 한두번은 어린 척하니 재미있었는데, 태생이 꼰대기질이 있는지라 28살이 나에게 언니 노릇을 하며 이것저것 시켜서 아, 못받아주겠네, 하고는 그만뒀다. 생각보다 거짓말이라는 게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기도 해서 지치기도 했고. 



그 이후로는 당당하게 내 나이를 밝히며 다녔고, 나이가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오히려 먼저 나이를 밝히고 사람들과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나보다 더 나이 많은 분들도 만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게스트하우스를 가지 않았고, 코로나도 겹쳐 새로운 여행객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어서 좀 아쉬웠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새로운 여행객들과 이야기할 자리가 있었다. 바로 세화에 위치한 전통주 전문 가게 ‘제주 한잔’에서 였다. 제주에서 나는 전통주들을 샘플러로 맛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방문했는데 마침 그 날이 ‘제주 한잔’이 오픈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1주년을 기념 해 저녁에 파티가 있다고 했고, 오늘 출시되는 신규 막걸리도 맛볼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꼭 참석하겠노라, 신청을 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어 가게로 들어가자, 다양한 핑거푸드가 셋팅되고, 사람들이 삼삼 오오 모여들었다. 친구와 온 사람, 연인과 온 사람 등이 보였고,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감정들에 나는 살짝 뒤로 물러서 있었다. 옆을 보니 나 처럼 테이블과 거리를 두고 혼자 서있는 여자 한명, 남자 한명이 보였다. 우리 셋은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고, ‘음, 우리가 다 혼자 온 사람들이군’ 하며 서로 눈인사를 했다. 



제주 한잔 사장님의 인사를 시작으로, 술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처음으로 받은 막걸리는 이시보 막걸리, 진한 색상에 비해 상큼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한모금 마시고 ‘오, 맛있다’ 감탄을 한 채 옆을 보니 옆에서 혼자 마시던 여자분도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는 배가 들어갔다고 하는 패치배치 막걸리, 눈길이라는 예쁜 이름의 막걸리, 농경의 신 자청비가 몰래 만들어 마셨다는 (메)밀주까지 연달아 맛있는 막걸리들이 나왔다. 한모금 한모금 막걸리를 맛보면서 우리 셋은 같이 의견을 주고 받았고,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도 하게 됐다. 



어디서 오셨냐, 여행이냐, 언제 왔냐 등등 간단한 이야기를 하다 드디어 나이에 대한 질문이 등장했다. 딱 봐도 20대 중반인 남자분이 먼저 나와 여자분에게 나이를 물었다. 대답을 할까,하던 차에 여자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저 나이 좀 많아요


약간의 부끄러움을 섞은 채 웃으며 여자분이 말했다. 음, 내가 봤을 때 그 여자분은 진짜 아무리 많이 봐도 30대 초반, 그러니까 딱 옛날 내가 나이 거짓말하고 다닐 때 그때의 내 나이로 보였다. 27살이라고 먼저 밝힌 남자분이 본인 또래같다며 말했고, 나 역시 어려보인다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에요, 저 지이이이이인짜 많아요.” 

그녀는 유독 ‘진짜’를 강조하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저보다 한참 어려보이시는데” 

“어휴, 저 정말 많다니까요. 제가 훨씬 언니일걸요~? 저 몇살 같아보이는데요?” 


"33살?"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아, 역시.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바로 이어 대답했다. 

“아니 너무 ‘진짜 진짜’를 강조하시길래.” 

“31살이요.” 

“뭐야, 어리네요. 진짜 진짜를 너무 강조하길래 일부러 많이 불렀어요.” 


31살이라는 나이가 주는 압박감이 있는 걸까. 그녀도 나도 31살이라는 나이가 뭐가 많다고 그렇게 나이든 척을 했는지. 어색해진 분위기에 우리는 각자 술만 홀짝였다. 남자분도 당황했는지 여행지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고, 몇군데 서로에게 여행지를 추천해주고는 두 사람은 같은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다며 숙소로 함께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홀로 남아 몇잔의 술을 더 홀짝이며 가게를 둘러보았다. 마무리가 좀 어색했지만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하니 재밌었다. 옛 기억도 나고, 신선한 감정도 느껴보고. 술기운도 오르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눈앞에 놓인 진한 막걸리들을 좀 더 마시고 싶었지만 이미 알딸딸하게 올라온 상태라 더 마셨다가는 내일이 힘들 것 같았다. 숙소도 세화에서 꽤 먼곳이었던지라 너무 취하면 숙소로 돌아가는 길도 걱정됐다. 나는 어른답게 잔을 내려놓고 인사를 하고 버스를 타러 나갔다. 



아, 나는 끝까지 내 나이는 말하지 않았다. 31살이라고 그녀가 말한 이후 내가 나이를 말하면 굉장히 민망해할 것 같아서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굳이 내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민망하게 하지 않아도 몇 년만 지나면 분명 그녀는 지금의 이 순간을 부끄러워하며 이불킥을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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