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워크로 발전하는 맥주라벨
첫인상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특히 상품에서 첫인상은 구매와 직결된다. 광고만 하면 팔리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모든 시장이 ‘프로듀스 101’이다. 매분 매초 개성 있는 디자인을 입고 화려한 퍼포먼스로 고객이라는 심사위원에게 필사적으로 어필해야 한다.
대부분 상품들이 포장 형태와 박스 디자인에 제약이 없는 반면 냉장고 속 음료는 혈혈단신이다. 오직 몸에 붙은 라벨로 찰나의 순간, 고객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음료 라벨에서는 절박함이 엿보인다. 로고, 폰트, 색깔, 형태, 모든 것이 눈에 띄어야 한다.
맥주 시장은 일반 음료 보다 더 치열하다. 종류와 브랜드가 다양한 만큼 더 극렬한 경쟁이 펼쳐진다. 짧은 시간 동안 필요한 정보와 무형의 가치를 동시에 전달해야 선택받는다. 당연히 화려하고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종종 고객들은 라벨 자체에 매료되어 맥주를 구매하고 병이나 라벨을 소장하기도 한다. 맥주 라벨이 마케팅의 전쟁터가 된 이유다.
맥주 라벨은 맥주의 전통성, 신뢰성, 정체성, 방향성 그리고 심미적 아름다움까지 모든 것을 함축한 예술과 같다. 이런 라벨을 범주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쩌면 난센스에 가까운 일이지만, 나름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맥주를 이해하는 또 다른 재미와 정보가 될 수 있다.
우선 디자인과 가치를 논하기 앞서, 맥주 라벨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알코올 도수, 재료, 상미기한 같은 정보를 반드시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표기사항은 맥주 라벨의 기본적인 책무다.
알코올 도수와 상미기한 등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했다면 비로소 라벨은 자유의 몸이 된다. 모든 브랜드는 철학과 개성을 로고와 디자인 속에 드러내려고 최선을 다한다. 흥미롭게도 맥주의 정체성을 관찰하면 라벨의 방향이 두 가지 범주로 나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맥주와 갓 태동한 크래프트 맥주 라벨, 이 둘은 언뜻 봐도 차이점이 도드라진다.
우선, 전통 맥주 라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브루어리의 로고다. 로고는 가문의 성(姓)과 같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통째로 드러내며 전통과 신뢰를 상징한다. 출시년도를 표시하는 것도 빠질 수 없다. 보통 로고 옆에 붙어있는 출시년도는 단순한 정보를 넘어 자부심에 대한 발로다. 모든 맥주가 자신이 태어난 해를 라벨에 붙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로고가 가문이나 성을 의미한다면 맥주 스타일은 족보다. 마치 김 씨 가문의 아들, 딸, 며느리, 사위 등과 같은 구분이다. 이들에게 이름은 필요치 않다. 스타일 구분만으로 각 맥주들의 성격과 정체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독일 뮌헨의 대표 맥주 파울라너를 보자. 파울라너 라벨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수도사의 얼굴이다. 과거 파올라 수도원에서 시작된 뿌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다음은 '파울라너'라는 가문의 성이중요하다. 우리는 파울라너 집 안이야라고 대놓고 보여주고 있다.
바이스비어, 필스, 헬레스, 도펠복, 둔켈바이젠 같은 세부적인 맥주 스타일은 '파울라너' 밑에 표기된다. 파울라너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라는 의미다. 맥주에 따른 개별적인 라벨을 붙이지 않는다. 어떤 맥주인지 깨알 같은 설명도 유치하고 격이 떨어지는 일이다. 파울라너, 이 하나만으로 맥주가 어떤 역사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 알지? 파울라너 가문의 아들이야’
로고와 맥주 스타일 외의 정보는 선택적이다. 전통적인 독일 브랜드들은 맥주 순수령을, 벨기에 맥주들은 자신들의 길드 마크를 넣곤 한다. 트라피스트 수도원 맥주는 육각형의 로고를 통해 전통 수도원 맥주임을 자랑한다.
이에 반해 생긴 지 길어야 몇 십 년, 짧으면 수년 밖에 안 되는 크래프트 맥주에서 가문이나 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체면을 차리는 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크래프트 맥주 라벨에서 중요한 건 이름과 정보다. 창의적이고 튀며, 때로는 도발적인 이름이 정체성을 대변한다. 그래서 개별 맥주마다 자신만의 이름을 갖고 있다. 맥주 스타일도 중요하다. 다양하고 복잡한 스타일은 크래프트 맥주의 매력이자 구매 포인트다.
예를 들어 크래프트 맥주의 효시 시에라 네바다를 보자. 이 브랜드의 대표적인 맥주는 시에라 네바다 페일에일이다. 라벨에서 로고 보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 그림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같은 브랜드의 시에라 네바다 톨페도 IPA를 볼까? 라벨 디자인이 완전히 다르다. 이름에서도 스타일을 뚜렷하게 표기한다. 소비자는 이름만 보고 페일 에일인지 IPA인지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불안한가 보다. 크래프트 맥주 라벨은 더 구체적인 정보를 보여 준다. 쓴맛을 나타내는 IBU와 색깔을 알려주는 SRM, 사용된 몰트와 홉은 물론 과일과 향신료와 같은 추가적인 재료의 정보도 실려있다. 배럴에 숙성된 맥주들은 배럴의 종류뿐만 아니라 어떤 와인과 위스키를 담았던 배럴인지도 깨알 같이 라벨에 나타낸다. 크래프트 맥주 라벨은 독립적이고 독특하며 정형적이지 않다.
전통적인 맥주와 달리 크래프트 맥주의 라벨은 온몸으로 개성을 드러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시에라 네바다라고 해, 노란색을 좋아하고 망고와 오렌지를 사랑해. 키는 186, 몸무게는 80이야. 나 어때? 빨리 잡아!’
전 세계에는 매우 멋지고, 우아하며 창의적인 라벨을 가진 맥주들이 많다. 그중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맥주 라벨을 소개한다.
바네하임은 서울 노원구를 대표하는 크래프트 브루어리다. 매년 봄에만 출시되는 벚꽃라거는 벚꽃이 들어간 라거 맥주다. 이 맥주의 라벨은 신윤복의 월하정인이다. 조선시대 달빛이 흐르는 골목길에서 한 남녀의 데이트를 그린 명작이다. 라벨에 있는 핑크색 꽃은 우리나라 고유 품종 겹볓꽃이다. 겹벚꽃은 크고 아름다운 핑크색 꽃잎을 갖고 있다. 바네하임은 맥주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겹벚꽃 나무를 두 남녀 배경으로 사용했다. 벚꽃라거 라벨은 이 맥주가 겹벛꽃을 넣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우리의 정서와 해학을 담은 한국맥주임을 드러내고 있다.
슈렝케를라는 독일 밤베르크의 전통맥주 라우흐비어, 즉 훈연맥주의 대표적인 브루어리이다. 슈렝케를라의 라벨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으로 가득하다. 오래된 비문과 같은 디자인에는 ‘Aecht Schlenkerla Rauchbier‘라고 되어 있는데, Aecht는 Original을 의미하며, Schlenkerla는 비틀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리를 살짝 절었던 브루어리의 대표의 모습을 본뜬 것이 브루어리의 상징이 되었다. 맥주와 지팡이를 들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우리는 이 라벨을 통해 이 맥주가 가지고 있는 전통성과 오리지널리티를 함께 경험할 수 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플레이그라운드의 맥주 라벨에는 전통탈들이 가득하다. 플레이그라운드의 맥주는 이러한 전통탈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각시탈이 라벨에 있는 ‘미스트레스 사워에일’은 17살에 시집와 3일 만에 신랑을 잃은 적적한 각시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소해 줄 수 있는 사우어 맥주에서 착안하였고, 파계승을 의미하는 중탈이 그려져 있는 ‘몽크 IPA’는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에서 시작된 아메리칸 IPA 스타일이다. 라벨이 맥주스타일과 연결되어 재미있고 의미 있는 스토리 텔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슈나이더바이세는 1872년 사라져 가던 바이스비어의 명맥을 이은 브루어리다. 현대적 바이스비어의 아버지로 독일 바이에른 밀맥주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슈나이더 바이세의 라벨은 자신을 상징하는 문양, 브루어리 이름 그리고 창립자인 게오르그 슈나이더의 얼굴이 그려 있다.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변화되고 있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여전히 오래된 가문의 힘을 통해 발산되고 있다.
과거 맥주의 라벨은 단순히 맥주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현재는 새로운 아트워크로 발전하고 있다. 오프너, 타월, 가방 등 다양한 굿즈들을 위해 고안되고 변형된다. 라벨이 새로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라벨을 하나의 문화를 즐기고 소비하는 것은 대단히 멋진 경험이다. 공감각적 경험을 라벨에서 느껴보자. 새로운 문화적 전율에 깜짝 놀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