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울음소리, 죽음과 울음소리... 희망 그리고 힘
네가 울면, 나도 운다.
한 TV 다큐멘터리(SBS) 팀이 가장 평화롭고 아름답다는 서태평양의 작은 섬 핀지랩을 찾았습니다. 185명의 주민은 공평히 나누고 서로를 보살피는 욕심 없는 사람들이지만,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하고 생존해 온 방식(근친혼)때문에 흑백 TV로 보는 듯한 전색맹인 사람들이 많아서 유명한 섬이었죠. 그런데 라디오 피디인 필자의 눈엔 그들의 노래와 소통이 신기했습니다. 가장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아름다운 화음이 매력적인 폴리네시아의 전형적인(애니메이션 '모아나'의 노래 같은) 노래였습니다. 아마 이 섬지역의 생존을 위해 전 생애를 조화를 지키며 성장하고 살아온 몸에 밴 태도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더 특이한 소리 사건(Sound Event)은 이 섬에서 환대를 받아 촬영을 마친 제작진이 해변에서 섬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 생깁니다. 섬주민 모두가 갑자기 울음을 울기 시작했습니다.(화면 속에서는 진심으로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울어요) 그들의 오랜 작별 의식이고 풍습이라는데 놀랍게도 어느새 제작진도 주저앉아 오열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집니다. 저 먼 한국에서 온 방송스텝과 서태평양 작은 섬나라 사람들의 울음소리는 섞여 묘한 합창이 되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서로 같은 마음에 닿을 수 있는 마법을 울음소리가 가능하게 한 걸까요?
이 특별한 공감의 마법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는 흔하게 발견됩니다. 어린이집에서 한 아이가 울면 그 울음소리를 듣고 다른 아이도 같이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잖아요?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이해력과 사회적 능력이 부족해도 먼저 공감하는 힘은 울음을 통해서 쉽게 가능하지 않을까요? 울음은 순수하면서도 힘이 센 원초적 공감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공감에너지의 힘의 원천은 아마 비슷한 소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텐데요. 울음과 이어지는 끝말잇기! 바로 음악입니다. 울음은 그 소리 자체로 음악적입니다. 지속적이고 고정된 반복되는 음이나 박자가 아니라 다양한 변주를 가진 소리라는 측면에서 더 그렇죠. 그래서 인간이 내는 소리(노래 말고) 중에서는 어쩌면 웃음소리보다는 울음소리가 더 음악의 형태와 닮아 보인다. 그래서 장례식장의 울음을 '곡(哭)'이라고 표현해요. 음악을 뜻하는 '곡(曲)'과 음이 같죠?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 울음(곡)
이렇게 음악과 이름도 성격도 비슷하기 때문에 공감을 쉽게 불러일으키는 울음은 사실 그 종류가 음악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슬퍼 울기도 하고, 기뻐 울기도 하고, 화가 나서 울기도 하죠. 그런데 그 울음들 모두 이성적으로는 참거나 통제할 수 없어서 뿜어 나오는 겁니다. 음악 중에서도 슬픔을 잘 대변하는 바이올린 곡 '비탈리의 샤콘느'를 들어보면(야사 하이페츠의 연주가 정말 최곱니다.) 연주자는 바이올린을 껴안고 공감해 주었을 뿐인데 바이올린은 세상 슬픈 소리로 우는 것 같습니다. 그런 울음 중에서 잊지 못할 울음소리가 있었습니다. 절차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확보된 1980년대 후반, TV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죠.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가 안치된 곳에서 자식의 주검을 붙잡고 우는 한 어머니의 목소리도 TV방송에서 들렸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평범하게 죽음을 애도하는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생이던 제 마음에도 그 울음소리는 잊지 말아 달라는 잊을 수 없다는 길고 긴 진혼곡이었으니까요. 아직도 그 흰 소복을 입은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잊히지 않습니다.
직업적으로 정말 잘 우는 사람, 대신 울어주는 사람 곡비!
죽음과 울음은 뗄 수 없는 관계죠. 특히 유교를 강조하던 조선시대의 죽음, 장례에서 울음소리는 더 중요했습니다. 유교적 사회/정치 이념에서 장례는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얼마나 잘 장례를 치러야 하는가로 국론이 분열되기도 했잖아요?(예송논쟁). 그래서일까요? 높은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시면 그 적절한 '슬픔'을 표현해야 했는데, 그게 쉽진 않았을 거예요. 손님을 맞이하면서도 제대로 울음소리를 내서 그 슬픔으로 망자를 달래고 효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곡비'라는 독특한 사람들이 있었다죠? 말 그대로 '곡'을 '대신'해주는 사람들, 즉 대신 울어주는 사람들이었고 명백한 직업이었답니다. 물론 그들의 특화된 능력은'잘 우는' 것이죠. 듣다가 나도 모르게 울게 할 만큼 잘 울수록 그들이 받아가는 돈도 컸다고 합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총소리를 멈춘 탄생을 상징하는 울음소리
죽음 말고 탄생이야 말로 울음의 '산실'입니다. 음악에 비유하면 비발디의 사계 중에서 1악장 봄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이는 마냥 울지만 사실 아이가 할 줄 아는 표현이 우는 것뿐이니까요. 그런데 이제 그 울음도 귀합니다. 낮은 출생률 때문이죠. 저출생의 늪에서 인구소멸을 걱정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딱 맞는 영화가 있었어요. '칠드런 오브 맨'은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멸망을 향해가는 인류 사이의 갈등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이 클라이맥스였습니다. 그때 쫓기던 중인 주인공 임산부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고 그 울음소리가 들리자 모든 총성이 멈추고 군인과 저항군들은 모두 총을 내려놓습니다. 전쟁을 멈추는 신생아의 울음소리라니... 정말 십 년 도 전에 나온 영화가 어떻게 이렇게 현실을 잘 묘사했을까요? 죽음을 상징하는 총소리와 탄생을 상징하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이때의 울음소리는 '희망'이죠.
사실 어린 존재의 울음은 많은 동물들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생존수단입니다. 태어나는 아이들의 울음은 탯줄을 끊고 이제 같이 폐로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음을 부모에게 알리는 인사기도 해요. 특히 사람은 조용히 천적을 피해 알에서 부화하거나, 태어나자마자 네 발로 서는 동물과 달리 주변에 널리 내가 태어났다고 건네는 우렁찬 인사죠. 그 작은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울음소리는 아이러니합니다. 혼자서는 이틀을 생존하기 힘든 가장 약한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내게 하는 원초적 힘을 전해주니까요. 그 힘이라는 글자가 마치 '희망'이라는 말의 줄임말 같네요.
다시, 울음은 희망이 되고, 힘이 된다.
가끔 울고 싶어 집니다. 그런데 나이도 있고, 이젠 어른이라고 생각하니 선뜻 눈물이 나오지 못합니다. 울음소리도 목아래 뱃속에서 잠겨버리죠. 그런데 울면 건강하다고 합니다. 울고 싶을 때 시원하게 우는 건 마음뿐 아니라 몸의 스트레스도 줄여준다고 하죠. 울음은 웃음만큼이나 (어머! 다음 주제를 미리 알려드리네요?^^) 좋은 의미의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리고 그 공감의 전달력이 만들어내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집니다. 함께 울 수 있다면, 함께 웃을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우리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건 나 혼자만의 바람이나 소망을 일컫는 건 아닐 거예요. 지금 내가 언제든 울 수 있는 일을 겪고, 혹은 울고 있을 때 함께 울어줄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하겠죠. 그때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울기 전 보다도 더 밝고 강한 내일을 찾아낼 거란 의미니까요. 신생아부터, 이별 순간의 울음소리까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음악이면서 희망이면서 힘인 울음이 멈추지 않길 바랍니다. 지금도 전쟁과 절망과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신생아의 희망의 울음소리가 들리길 바랍니다. 그리고 억울한 죽음에 함께 우는 우리의 울음소리가 들리길 희망해봅니다. 혹시... 당신도 울고 있나요? 같이 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