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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Nov 05. 2024

인생이라는 OST- 길보드차트

애써 듣지 않아도 늘 들려왔던 소리의 기억들.

"영화의 절반은 소리다, 관객들이 영상을 보며 경험하는 감동과 재미의 절반은 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경험하는 것 때문이라고 믿는다."

                                              - 영화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 -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라디오 방송 같아요.


  제가 아주 어릴 때도 스타워즈는 인기였습니다. 엄마의 검정 치마허리를 목에 두르고 다스베이더 흉내를 내거나 신기하게 번쩍이는 레이저 칼을 상상하며 허공에 약속대련(?)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구체적인 스토리나 장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상황과 장면을 모두 머릿속에 그려내기엔 기억력이 부족해서기도 하겠죠. 그래도 처음 검은 우주에 별빛을 배경으로 글자가 흐르고 그때 들리던 웅장한 음악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재생됩니다. 귀엽고 갖고 싶던 로봇 R2의 전자음도 잊히지 않죠. 모두 소리가 남겨놓은 기억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 조지 루카스가 영화의 절반은 소리야~라고 한 건, 라디오 피디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는 아닐 거예요. 눈으로 보는 것과 소리로 듣는 것이 합쳐질 때의 몰입감, 리얼리티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무엇보다. 소리는 예전의 글들에서도 밝혔지만 무척이나 오래가는 기억에 속합니다. 경험을 사람의 근육에 비유하자면 적색근(오랫동안 만들어지고, 오랫동안 쓰는 힘에 작용하는 근육들)이 되어가는 거죠. 당장의 폭발적 힘을 발휘하는 백색근(단기간에 힘을 쓰기 위해 사용되는 근육)은 오히려 영상에 해당될 거란 생각도 들어요.


  동물도 그렇습니다. 엄마의 얼굴과 생김새를 알아차리고 은신처나 동굴에서 얼굴을 내밀진 않습니다. 그러다간 천적의 먹이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동물도 어미의 울음소리를 듣고 알아차립니다. 어린 동물에겐 삶의 아니 생존의 모든 것이 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그래서 묻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삶이라는 걸 소리로 바라보면 어떤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을까요? 프롤로그에서는 캄캄한 귀갓길에 마음 편한 사람에게 거는 전화 한 통이 마치 라디오 방송 같고, 전화를 받아주는 정겨운 사람은 라디오 DJ 같다고 썼습니다. 어쩌면 눈꺼풀을 영원히 감기 전까지 소리만 들린다면 우리 삶 자체가 한 편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과 비슷할 거란 생각도 해봅니다.



길보드와 엄빠의 18번 노래



  이제는 저장매체(LP, 테이프, CD, mp3플레이어)에 음악을 담아 듣지 않습니다. 물건으로서의 음악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일종의 흐름과 연결(온라인 스트리밍)이라는 방식으로 음악을 듣고 즐기죠. 하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길거리엔 늘 영화 OST음악처럼 음악이 흘렀습니다. 선곡의 기준은 오로지 인기였기 때문에 다양한 음악을 듣고 싶은 취향의 사람들에겐 때론 소음처럼 성가시기도 했지만. 거리에 음악이 들린다니... 저작권이 시퍼런 시대엔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물론 창작자들의 노고를 보상하기 위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고요. 그런데 그 길거리의 음악을 틀어주던 이른바 불법복제음악테이프를 파는 리어카(손수레)의 음악을 미국의 빌보드(Billborad) 차트에 빗대 '길보드(Gill or Street Board) 차트'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휴가를 보내고 복귀하는 군인들에겐 필수 구매품목이기도 했죠. 부대 담장 안에서는 신곡에 목마른 20대 초반의 남성들이 가득했으니까요. 물론 획일화된 군대의 풍습답게, 선곡은 선임이 애정하는 곡들로 획일화되긴 했습니다.


  요즘은 젊은 트롯 영웅(?)들에게 자리를 빼앗겼지만. 한 때 여심을 사로잡은 가왕 조용필, 나훈아, 남진 이런 분들의 노래를 길보드가 아니라 마당보드 차트나 음주차트로 들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재래식 가옥에서 마당은 부엌이 되기도 했는데요. 커다란 대야를 놓고 김치를 담그거나 손빨래를 하시던 어머니는 늘 노래를 흥얼거리셨습니다. 또 자주 술에 취한 아버지의 엇박자 노래도 흘렀습니다. 가사도 이해 안 되고, 선율은 더더욱 낯설었던 노래들이었지만. 오래오래 남아서 삶의 OST 중 하나의 삽입곡들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의 어머니 아버지 나이가 된 지금, 혼자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늦은 술자리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나도 모르게 두 곡의 OST가 재생되기도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꿈이 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나도 아쉬움 남아~"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이젠 이어폰에 막혀서 그가 무슨 노래를, 음악을 듣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나의 취향이 강요되지 않아서 좋기도 한데... 당신의 취향을 알 수 없고, 나의 취향을 넌지시(넛지!) 전할 수 없어서 아쉽기도 합니다. 길보드도 마당보드도 음주보드도 없어진 시대, 알고리즘이 내 마음을 넘겨짚어 추천하는 곡들을 듣다 보면 가끔은 참 적막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여로, 백학, 나 지금... 떨고 있니... 대한민국~! 오징어게임?



  드라마의 시댑니다. 세계적으로는 사건사고를 다루는 'True Crime'류의 콘텐츠가 가성비 덕분에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보다 수천 배는 더 노력과 제작비를 들인 드라마의 인기는 폭발적입니다. 넷플릭스의 흥행작들이 그렇죠. 오징어 게임의 게임방법과 탈락자는 잘 기억나지 않아도 음악감독 정재일의 피리소리로 만든 타이틀 곡은 모두 기억합니다.(정재일 감독은 정말 자유롭고 순수하게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음악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군 입대하기 전에 제 방송에 출연했고, 둘이 찍은 사진도 있죠... 그분은 기억도 못하겠지만... 깨알 자랑) 마찬가지로 '영구 없~다'라는 개그유행어를 만들어낸 '여로'라는 초창기 드라마는 거리에 사람이 다니지 않을 만큼 수십 퍼센트의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이죠. 동시간대에 동시대 사람들이 같은 장면을 보고 울고 웃다니... 요즘 세상엔 상상도 힘듭니다. 그런 흐름은 개인별 미디어가 발달하고 안착되기 전까진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동시적 소리 경험의 마지막은 아마 2002년 월드컵일겁니다. 4강 신화까지 매 경기 골장면도 유명하지만 짝짝짝 짝짝! 대~한민국의 구호가 역시 선명한 동시적 집단

경험이죠. 역시 소리여서 그럴까요? 조건반사(?)처럼 남은탓에 요즘도 가끔 자동차 경적을 저 박자로 가볍게 눌러주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도 100명 중에 1명은 '대~한민국'하고 황당한 리엑션을 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집단이 동시에 경험한 거라도 더 강했던 드라마 중에서는 '모래시계'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노래 '백학(crane)우우우 우우~‘이 흐르기만 해도 '나 지금 떨고 있니?'라는 대사가 자동 재생되기도 했으니까요. 소리의 경험은 이렇게 우리를 촘촘하게 이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리의 경험은 특정한 의미로 해석을 좁혀 강요하진 않습니다. 모래시계의 경험이 그당시 시대를 다룬 콘텐츠의 유행('여명의 눈동자' 류의)이었지만. 그 드라마의 내용의 기억보다는 방영 당시의 내 인생과 마음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힘들었던 입시공부의 지겨움이나... 첫사랑의 아리고 쓰린 기억이 모래시계와 함께 합니디. 바치 남자 주인공이 된 기분처럼 말이죠... 요즘도 어디선가 그 백학이라는 곡이 들리면 지금 그 첫사랑은 어디에서 잘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흐르기도 합니다.



   거리에 음악이 흐르게 하라



  소제목을 써놓고 나니 무슨 정치구호 같네요. 저작권 보호와 정당한 보상만 가득하다면 거리에 음악이 좀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늘 라디오를 켜놓고 사는 제가 느끼는 소리와 일상의, 일생의 경험은 보이는 것, 느끼는 것들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 감정을 좀 완화시켜 주거나, 때론 강화시켜주기도 한다는 거죠. 누군가에게 고백하려고 하는데 때맞춰 두 사람의 추억이 가득한 노래가 흐른다면... 아무런 고백의 말이 없어도 마음은 전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순간을 잊을 순 없을 겁니다.


  지금은 다행히 많은 시내버스 기사님들이 길보드차트 못지않게 라디오 방송을 함께 나눠 들으십니다. 승객 서비스이기도 한데요. 반가워서 버스 안을 둘러보면 대부분 블루투스 이어폰에 귀가 막혀들 있습니다. 뭐... 시대의 변화고 기술의 발전이니... 좋다 나쁘다 말할 순 없지만. 함께 같은 시간에 같은 경험을 느끼는 공감의 단서는 놓치고 사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다시, 거리에 음악이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마스와는 무관하게 불행할 것 같은 나날들에도 거리에서 캐럴이 들리고 (똑순이 캐럴~) 모루와 트리 장식이 문구점 벽마다 걸려있을 때, 그래도 나는 크리스마스를 살고 있구나... 하고 위로받기도 했거든요. 아직도 심형래, 똑순이, 이선희 어린 날의 다종 다양한(?) 분들의 캐럴이 들리던 거리를 기억합니다. 손은 시렸고,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옷은 얇았지만 한참을 서서 빨간색과 은색의 반짝이는 모루를 본 기억은 '캐럴송' 덕분에 따뜻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엇? 초코파이송?) 수 있는 슬픔과 어두움을 겪고 있습니다. 같이 겪고 있죠. 하지만 알면서도 모른 척 우리는 이어폰을 꽂고 자신만의 몫으로 가둬버린 채 이 시대를 적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소한 '라디오를 켜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디오와 소리와 삶의 온기에 예민한 라디오 인들이 만든 이야기와 음악을 같이 듣는 건 어때요? 라붐의 소피마르소에게 헤드폰을 씌워주자 들렸던 리챠드 앤더슨의 'Reality'노래처럼... 어쩌면 그 가사처럼 제가 꾸는 이런 '꿈들은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라디오를 켜두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음악은.... "Dreams are my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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