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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Aug 21. 2024

말과 글의 중력, 사건의 지평선

침묵을 활자로 듣고, 소통의 블랙홀을 발견하는 초보물리학

줄이고, 줄이고 줄이다 사라지면 길이 열린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말을 줄이고, 활자로 압축한다는 것과 같다. 

생각의 말을 침묵 속에서 활자로 그려내는 것, 글로 쓴다는 것.

묵언수행을 하다가 홀연 절을 떠나고 스스로의 몸을 떠나는 수행자 이야기를 들었다. 


  가진 물건을 줄이고, 머무는 방 마저 줄이고... 줄이다 없애고, 그 안의 나 자신도 없애는 일은 블랙홀이 되어가는 과정과 닮았다. 태어난 별이 오랜 에너지와 이야기를 품다가 거대한 빛으로 커지다가... 결국엔 가진 모든 부피와 이미지를 잃고서 오로지 질량만 남은 채로 블랙홀이 된다. 본질적인 힘 '중력'만을 남긴다. 그제야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이 열린다. 길을 열려면 본질적인 힘에만 집중해야 하니까. 물론 그 세계로 가 본 사람은 아직까진 알려지지 않았다. 어느 거릴 걷다가 묵언수행 끝에 그 소통의 블랙홀을 찾은 수행자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묻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끊임없이 밀어내는 우주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중력'은 삶의 근본적인 힘.


  인간 시각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중력은 위와 아래, 뉴턴과 사과라는 한 장면 묶여 있지만... 사실 우주에서는 위, 아래, 좌우의 개념은 없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팽창하는 우주와 그 안에서 '이전'으로부터 '이후'로까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며 서로를 밀고 당기는 은하계와 행성들의 공동운명체만 있다. 이 서글픈 이별의 근본적인 물리현상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고 이별하고 이별하고 이별하며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흐름에서 우리를 기억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중력' 끌어당기는 힘이다. 우주는 태초 이래로 밀어내기만 하므로 거기에 반해 우리는 맹렬하게 끌어당기며 기억하고, 살아가고, 사랑한다. 


  말과 글도 중력이 있다. 어떤 말과 글은 삶의 땅에 두 발이 닿을 수 있게 나를 당긴다. 그 말과 글의 중력이 모이면 좁은 공간에 모두 들어갈 수 없어 질량만 남고, 그것은 침묵이 되고 더더욱 완벽한 침묵이 되면 블랙홀이 된다. 다른 세계와 마음으로 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일상의 평범한 대화 속에서도 깊고 짙은 침묵을 내 보이면 상대는 그간 닿을 수 없었던 진심과 진실의 이정표를 슬쩍 보여줄 수 있다. 나의 세계에서 너의 세계로 도무지 닿기 어려울 때 침묵의 블랙홀을 궁리해 본다. 


말과 글을 지우면 '사건의 지평선'이 그려진다. 


  말과 글은 말과 글이 아닌 것들을 말과 글로 대체하고 설명하는 것. 

  엄마...라는 두 글자 안에 엄마의 온기와 향기와 사랑과 머릿결과 그리움을 다 집어넣을 수는 없다. 다 품을 수 없는 그 두 글자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때론 엄마라는 말과 글을 지우고, 지워진 그 자리에 엄마와 연결되는 그 모든 걸 상상한다. 마치 블랙홀처럼 부피는 모두 사라지고 질량만 남아 상상할 수 없는 중력으로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처럼 침묵은 비우고 없앤 자리에 비우고 없앤 것들 보다 더 큰 것들이 품어지는 '사건의 지평선'을 긋는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이 내가 엄마... 하고 부르지도 못한 채 마음을 만질 때 보이는 것들이다. 


  물리학에서 '사건의 지평선'은 빛조차도 들어갔다가 되돌아올 수 없는 물리학적 경계를 말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은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서야 비로소 미안하고 안타까웠던 딸의 그 순간을 찾아갈 수 있었다.  물론 영화에서는 150살이 된 딸과 재회하는 40대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지만... 어쩌면 이 냉혹한 우주의 물리법칙은 우리에게 '재회'를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게 순리라면.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물리학백과 '사건의 지평선')



침묵의 블랙홀


  다시 침묵으로 돌아와. 깜깜하고 무겁고 작은 침묵을 매만져본다. 침묵은 모든 언어를 대신할 수 있다. 

말과 글의 좁고 부족함을 대신하는 슬픈 제물이 기꺼이 된다. 거대하고 소란스러운 소통의 바다를 떠다니는 생각과 말이라는 빙산의 일각. 침묵. 그 침묵은 말들에서 몸집을 줄인 글로 다시 그 글조차 없는 생각으로 그 생각에서 소리가 없는 그러나 들리고 전해지는 말로 변해야 '블랙홀'만큼 압축된 질량과 근본적인 힘과 소통의 가능성을 가진 사건의 지평선을 그려낼 수 있다. 


  유튜브에서, 온갖 미디어라는 도구를 통해 떠드는 말들과 간섭되어 의미를 잃어버린 여러 사람들의 섞인 말소리에서 당신의 침묵만이 선명한 피사체가 된다. 포커스 아웃된 풍경에서 당신의 침묵만 뚜렷한 윤곽을 가질 수 있다. 침묵할 수 있는 가? 우주의 거대한 침묵을 보며 우리가 도달하게 될 꼭 가고 싶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는 작은 오솔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침묵한 당신의 눈동자에서 그 길을 상상한다. 


   이제, 단 하루라도 말하지 말자. 글로 쓰자. 글도 지우고 생각하자. 그 생각을 나 아닌 모든 당신이 알 수 있도록 하자. 고맙게도 중력은 우리를 멀어지지 않게 해 준다. 고맙게도 중력은 우리를 여행하게 해 준다. 



 * 2024년 7월 초고를 쓰고, 2024년 8월 다시 생각과 풍경을 입혀서 짓다. 

** 물리학은 사물과 존재의 이치를 설명하는 학문이지만 가만히 보면 마음도, 삶도 닮아있다. 오래전 학부시절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책을 야심 차게 열었다가. 부족한 사고력과 독해력에 닿았던 기억이 난다. 다시 보니 중고책들로 아직 인터스텔라(성간)를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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