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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Sep 10. 2024

라디오를 들으면... 부유할까 가난할까?

소리의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소리

일하는 사람들에게 최적화된 미디어, 라디오


  보고 듣고 즐길 것들이 손안에 넘치고 있는 시대. 데이터와 구독료 걱정만 없다면 지루할 일이 평생 없을 것 같은 2024년의 여름. 오히려 지루함을 애써 만들어 서비스하는 그런 사업이 생겨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루할 틈이 없는 사람들에게 지루할 틈을 서비스한다는 것. 다채롭고 다양하게 각자의 개성과 취향을 정확하게 목표해서 전달된 미디어들의 홍수는 지루함을 느낄 여유도 없는 피곤함을 가져온 건 아닐까?


  일하는 사람들이 틀어놓은 라디오는 때론 혼잣말을 하는 좀 멋쩍고 우스운 소리통 같다.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lean forward) 듣는 몰입형 매체나 콘텐츠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하게 뒤로 누워서(lean Back) 긴장을 풀고 흘려보내는 콘텐츠도 아니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동행형 매체'가 라디오다. 학계에서는 '이중 시간의 창출'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일하면서 혹은 이동하면서 듣는다. 필요하고 관심이 있는 정보나 음악이 들리면 집중하고 그렇지 않을 땐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다. 지루하거나 몰입되거나의 양극단이 아니라 지루하다가도 몰입하고 몰입하다가 지루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매체. 


(출처 : 한국관광공사홈페이지 - 워낭소리 촬영지 홍보물 중에서 주인공 소와 할아버지의 동상. 달구지 옆에 라디오가 있다)


  실제로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일하다 보면 세차장에서, 알바를 하는 카페에서, 시내버스 기사와 택시 기사들이 듣고 있다는 사연을 많이 보내준다. 일하는 사람에게 라디오의 이중적인 소리 콘텐츠는 유용하고 필요하다. 십 수년 전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큰 화제와 관심을 불러일으킨 '워낭소리'. 소와 할아버지의 끈끈한 우정은 함께 흙을 일구고 곡식을 키우는 고된 노동에서 나온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아도 계절과 자연의 초침에 맞춰 부지런한 할아버지와 늙은 소. 그 소달구지 옆엔 라디오가 걸려있고 유행가와 뉴스와 이런저런 이야기가 흐른다. 지루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흐르는 이야기는 소와 할아버지가 땀 흘리는 노동의 공통분모가 되어준다. 이런 노동에서는 어떠한 '소외'도 발견되지 않는다. 농사지은 작물의 가격이나 유통, 시장이 출렁거려도 자연과 소와 할아버지의 생산과 수확, 그리고 그 사이에서 미디어의 위치는 정직하다. 


오늘도 당신의 하루에 가로등이 되어드릴게요. 


  라디오는 20세기의 초반에 우리에게 등장한 신기술이었고, 마법이었다. 그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미국 라디오 방송 드라마 '화성침공'에서 외계인이 왔으니 대피하라고 하자 실제로 100만 명이 넘는 미국 시민들이 피란길에 오른다. 그때부터 라디오는, 정확하게는 매스미디어는 아주 무섭고 강력한 사회적 도구가 되어 전쟁과 산업과 사람들의 삶에 미디어연구에서 표현하는 그대로의 강력한 효과를 미치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정치시사나 대담토크(Voice Contents) 분야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지만... 라디오 자체를 듣지 않는다는 점에서 FM 주파수를 사용하는 라디오 매체의 영향력 즉 청취율은 이제 미미하다.  


  하지만 종종 전문가 집단뿐 아니라 라디오 매체나 오디오 콘텐츠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 이제 유튜브 시대 아니에요? 라디오도 그냥 유튜브 하면 되죠?
 - 5G 통신망과 미디어가 이렇게 발전했는데... FM 라디오가 필요해요?
 - AOD서비스만 잘 만들면 듣고 싶을 때 맘 껏 듣는 거 아닌가요?
 - 누가 편성시간을 기다려서 그 시간에 라디오를 켜나요?
 - 라디오는 알고리즘이 없어서 내 취향을 발견하기가 힘들어요! 

 - 이제 라디오는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차에서 라디오 듣는 건 봤어요... 전 안 들어요...


(사진-김틈 : 2017년 어느 날  텅 빈 도로에서 찍힌 가로등, 하늘 위로 뻗는 빛이 마치 가로등 같다. 흐린 하늘과 가로등이 라디오의 상황과 같은 느낌)

  적절한 답이 될지 모르지만 라디오가 필요하냐는 질문마다 그 필요성을 답한다. 이를테면 모두에게 편리하게 정보가 흐르지 않고, 부모님의 지원으로 데이터 걱정 없이 쓰는 세대 외에도 많은 사람들은 일하면서 손쉽게 정보를 얻으며 음악도 듣고 적막함을 이겨낼 필요도 있다는 것. 이걸 비유로 표현한다면 


 - 라디오는 가로등입니다. 돈이 되든 안되든 켜져 있어야 합니다. 단 한 사람! 당신이 지나간다고 해도...

 - 라디오는 등대입니다. 장사가 안되다고 꺼버리면 어떤 외로운 이는  표류하거나 암초에 부딪힙니다.

 - 화려한 조명과 불꽃이나 네온사인은 주문형 미디어입니다. 화려할수록 좋죠. 그것들과 라디오는 다릅니다.

 - 최초의 미디어지만 위험한 순간 건전지 하나로 보름 넘게 세상과 소통할 최후의 미디어가 바로 라디오!

 - 홀로 사는 방에 라디오를 켜두세요. 퇴근 후엔 반갑고, 원하는 목소리로 FM주파수를 돌리면 포근해집니다. 

 - 혼자 사는 집에 라디오를 켜두세요. 소리로 기웃거리는 도둑은 얼씬도 못할 거예요. 

 - 라디오를 켜고 커피 한 잔, 커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이용료가 없는 고품질의 콘텐츠가 나오는 곳!

 - 돈 없다고 신호등 꺼버리면 생명과 재산이 위험합니다. 라디오는 그런 공공의 공적 성격의 미디어입니다.

 - 라디오는 약자가 접근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매스미디어'입니다. 


  자본주의와 성장일변도의 상업성으로는 라디오는 설명되기 어렵다. 오히려 아주 좁은 틈새시장의 이동 고객을 타깃으로 한 제한적 레거시(과거의) 미디어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목적과 필요만 정확하게 계산되는 일상을 살진 않는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가방 속에도 가득하고 핸드폰 사진 저장함에도 가득하다. 하지만 필요를 넘어서 일상의 감성과 기억을 채우는 것들이 나중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된다. 

  

   오히려 주변의 사회적 지도층, 기업 대표님 많은 분들을 만나보면 주로 차에서 라디오를 듣는 경우가 많다. 직접 운전을 안 하는 경우에도 방해받지 않고 두뇌노동을 최소화하면서 트렌드와 정보를 제공받는다고 한다. 특히 많은 분들이 음악(몇몇 음악 FM의 선곡은 알고리즘을 뛰어넘는 감성적, 문화적 맥락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방송을 즐겨 들으신다.  라디오를 들으면 부유할까... 가난할까.. 처음의 궁금증에 답해드리면 라디오를 듣는다고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다. 라디오는 그 모두에게도 유용한 매체다. ^^;


(사진-PD연합회 : 2016년 11월 넥스트라디오 포럼 '재난과 라디오' 사회자로 손석희 당시 JTBC앵커를 패널로 모셔서 포럼을 진행했다.)


가난한 자의 소리, 부유한 자의 소리 


  물론 부의 정도와 유무에 따라 삶의 주변을 채우는 소리가 다르다. 훨씬 조용한 화이트칼라의 업무환경과 시끄럽고 복잡한 블루칼라의 업무환경은 소리가 명백히 다르다. 그게 공사현장이나 대형 공장이라면 더더욱 차이가 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주변 소리는 크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작고, 부유한 사람들의 주변 소리는 작지만 부유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크다.


  하지만 그 소리들도 거대 재난과 기후 변화 앞에서는 공평하다. 공평 누군가는 희망이고 누군가는 절망으로 받아들일 이 공평의 의미는 자연이 이미 우리에게 여러 번 가르침을 주었다. 실제로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거대 재난 상황에선 최신형 폰이나 고급 자동차와 집은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지역의 공동체 라디오가 사람들의 생사와 정보를 전해주는 고마운 역할을 했다고 한다.(위 재난과 라디오 포럼에서 일본 측 패널의 발표 중)


  영화 '터널(하정우 주연)'이나 최근 영화 '탈주(이제훈 주연)'에서도 라디오는 희망의 등대, 안전의 가로등이 되어준다. 영화 내용을 스포일러 할 우려가 있어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우리가 라디오를 듣는다는 것은 모두에게 전해지는 공통의 시간과 경험을 나누는 의미가 크다. 


  목이 말라서 한 병의 물을 사 먹는 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좁은 필요와 충족이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인간과 자연과 지구 모두가 함께 경험하는 공통의 삶과 맥락이 되니까. 유튜브가 편의점의 생수 한 병 이라면 라디오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지금 라디오를 켜면 당신을 향한 무수한 이야기와 음악과 외로움을 채울 온도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당신의 마음은 몇 Mhz(메가헤르쯔)로 내리는 비일까? 나는 당신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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