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의 단편집
('플러스, 마이너스(4)'에서 이어짐)
5. 그리고
뮤지컬 예매를 성공하자마자 채경에게 일정과 자리를 문자로 알려줬다. 채경은 환호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자기분의 티켓값을 바로 보내왔다. 이십 만원 가까운 금액이지만 이건 봐야 한다. 제법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는 채경과는 종종 뮤지컬을 보러 가곤 했지만, 최근에는 우리 둘 다 좀 아껴 쓰자며 몇몇 작품을 건너뛴 상태. 그러나 이번에 내한하는 작품만큼은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예매 시간이 되자마자 클릭 신공을 발휘했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작품 서너 개를 건너 뛰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R석에도 겁내지 않고 결제를 눌렀다.
오후 여덟 시 공연. 다섯 시 반이 되자마자 부서 사람들에게 인사한 후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채경과는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식당에 자리잡았다. 뮤지컬 때문에 한 달에 두어 번은 꼭 만났었는데 거의 세 달을 못 보고 처음이니 오랜만에 보는 편이다. 밀렸던 얘기를 나누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은 채경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지나갔다. 채경은 여름을 남들보다 일찍 맞이한 복장으로 시선을 즐기는 듯했다.
“이야, 우리 채경쒸, 과감한데?”
“에휴, 가리면 뭐해. 이렇게 열심히 몸관리 하는데. 너도 계속 필라테스 해?”
“나는 당분간 좀 쉬려고. 피티가 너무 비싸...”
“개인으로 해서 그런 거 아니야?”
“맞아. 근데 모르는 사람들이랑 그룹으로 하긴 좀 불편하기도 하고. 어색한 건 싫어.”
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 인정. 나도 계속 첨에 잠깐 1인으로 하다가 요즘에는 3인 그룹으로 하고 있어. 아, 너도 미현이 알지? 김미현. 최예원도 아나? 그렇게 셋이서 하거든. 센터가 좀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들이랑 하니깐 불편하지도 않고 그 김에 친구들도 만나니깐 기분도 좋고.”
“헐! 미현이 필라테스해? 의외다. 예원이는 누구지, 가물가물하네. 내가 생각하는 애가 맞는지 모르겠네. 미현이는 우리 과 동기들 중에서 가장 열심히 살던 애잖아. 좋은 회사도 가장 일찍 들어가고. 나도 지난번 언젠가 만났었는데...”
한동안 우리는 미현의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파편화되어 있었지만 주요 뼈대는 비슷했다. 미현은 과 성적도 좋았고 성실했으니깐 과 동기들 중 가장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얘기.
채경은 요즘 종종 골프를 치러 간다고 했다. 마케팅 제품 중 골프의류가 있어서 협찬을 꽤 받는 모양이었다. 채경은 내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근데 이런 명품이 하나도 없어. 종종 필드 다니다 보니깐 신경 안 쓸 때는 몰랐는데 알고 나니깐 확실히 보이더라. 하나쯤은 있어야겠더라고, 포인트로. 요즘에는 대학생들도 가방 하나씩은 갖고 다니잖아. 나야 협찬 제품 위주로만 쓰니깐 몰랐는데 예원이랑 지난번 필드 나갈 때 확 그 느낌이 오더라. 막 진짜 으스대려고 사는 게 절대절대 아니라 딱 스타일링의 마지막 방점을 찍는 느낌이랄까?”
나는 채경에게 내가 아는 브랜드들의 이야기를 알려 주었다. 어디서 사는지, 어떤 브랜드를 좋아하는지, 제품별 가격대가 어느 정도인지. 오늘 가져온 디올을 들어 보였다.
“이게 내가 살 때는 삼백? 정도였는데 요즘에는 한참 올랐을거야. 사람들이 못 사서 안달이니깐 똑 같은 제품이라도 지들 맘대로 백, 이백은 장난처럼 뚝딱 올려버리더라니깐. 누굴 호구로 아는지... 얘는 이십만 원씩 일년 적금 넣은 거로 산 거야. 사 개월 할부 보태서. 가방도 그렇고 명품들이 단가가 높으니깐 현금, 체크, 신용으로 나눠서 사면 좀 합리적인 편이야. 연말정산도 생각할 수 있고 포인트 적립도 적당히 챙기고.”
“십이개월이나 이십사개월도 할부가 될까?”
“백화점이나 카드마다 다를 거야.”
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얘기를 이어가다 공연 시간에 맞춰서 극장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우리의 사진과 티켓 사진을 스토리에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열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내일의 출근은 걱정되지 않았다. 뮤지컬 감상의 여운에 설레는 마음으로 채경의 미니에 올랐다. 한창 뮤지컬을 보러 다닐 때도 차가 있는 채경 덕분에 편하게 집에 올 수 있었고, 대신 나는 매번 커피나 음료를 사오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이 시간에 뮤지컬이 끝나면 서울의 정체도 꽤 해소된 시점이라 드라이버 채경도 불편해 하지 않았다. 음료를 마시며 아경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드라이브할 수 있었고 뮤지컬의 감상도 나눌 수 있었다.
“나도 이제 차 사야하는데...”
“사, 너처럼 회사다니면 나는 벌써 샀겠다.”
나는 미니의 내부를 둘러보며 물었다.
“얘는 삼천정도?”
채경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내가 살 때는 사천 정도였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하하하,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리스를 끼고 샀거든.”
“리스, 듣기만 했지 자세히는 몰라.”
“그게, 할부 같은 건데, 일부 선납하고 나머지는 나눠내고 뭐 그런거야.”
채경은 갸우뚱하는 나를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천만원 선납하고 나머지 삼천 몇 백을 육십개월로 나눠내고 있거든. 한달에 오십만원 조금 넘게 나가고 있어.”
“매달 그렇게 나가면 부담스럽지 않아? 유지비 포함하면 월세 비용 정도 되겠는데?”
“그렇긴 한데, 그래도 사천 몇백이 없으니깐. 이정도면 나름 합리적인거 같아.”
듣고 보니 그렇긴 하다. 나는 채경에게 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채경도 자동차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국산차도 알아보긴 했는데, 어차피 월로 나누면 십에서 이십정도밖에 차이 안나더라고. 이왕 살꺼면 이쁜거 사고 싶어서 얘로 샀지.”
그동안 채경의 차를 종종 타면서도 가족이 구매비용을 보태줬거나 모은 돈이 많았거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저래 계산해보면 나도 충분히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채경은 멋지게 내가 사는 오피스텔 앞으로 착- 차를 세웠다.
“채경아, 고마워! 매번 진짜 편하게 온다, 야.”
“무슨 말씀을, 너가 예매 성공한 덕에 알차게 봤네. 또 연락하자!”
채경은 손을 흔드는 나에게 창문 너머로 덧붙였다.
“혹시 미니 관심있으면 우리 딜러 연결해 줄게. 내가 같이가도 되고. 차 구경가는거 은근 재밌거든.”
고마운 말이다. 나는 채경에게 연이어 손을 흔들었다. 채경도 활짝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차 너머로 던졌다.
“얼른 들어가, 혜선아! 도착하면 문자할게!”
천천히 출발하는 미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자기 전 차를 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