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생각나는 장면 하나가 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대선을 앞둔 시기였다. 아빠가 실종되다시피 한 날이 있었다. 토요일이었다. 당시엔 주 6일 근무하던 때라, 아빠는 일찍 일을 마치고 퇴근할 예정이었다. 엄마는 뭔가 계획을 세워놓고 아빠를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빠는 오지 않았다. 연락도 닿지 않았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온 아빠는, 자신이 지지하던 후보 DJ의 유세를 하루 종일 쫓아다녔다고 했다.
엄마는 화가 날만했다. 가족의 계획이 틀어진 것도 그랬지만, 엄마는 당시 YS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도 지지하는 후보가 있었다. 내 기준은 명확했다. 엄마, 아빠 중 확실히 엄마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난 YS의 지지자였다.(혹시 오해할까 봐 밝힙니다. 지금은 엄마 따라 대통령을 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집은 분열될 위기에 봉착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보통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적 갈등은 일단락됐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는 거대한 평가의 메커니즘이고, 난 단 한 번도 그걸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내가 어렸을 때조차 지지 후보가 있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난 대선 후보를 평가한 부모님을 평가했고, 그 평가에 따라 대선 후보를 골랐었다. 물론 내 평가는 아무 힘이 없었지만.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랬다. 우리가 대선 후보를 두고 논쟁을 벌일 때면, 다 부모님의 평가에 기대서 열렬하게 지지를 표명했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우린 끊임없이 누군가를 평가해 왔다.
다시 대선 정국이다. 정치인은 평가받는 게 숙명이다. 누군가는 그 평가가 잘 됐는지 평가하고, 평가에 대한 평가가 온당한지 평가하기도 한다. 1차, 2차, 3차, n차... 수많은 평가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꿈속의 꿈, 평가 속의 평가가 끝없이 중첩된다. 이 시스템 속에서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세계는 평가에 의해 돌아간다. 평가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가하지 않으면 한 마디도 보탤 수 없는 판이다. 국회에 불려 나온 정부 인사가 입버릇처럼, "저는 그 부분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난감한 질문을 피해 가지만, 실은 위치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사소한 문제에도 평가는 이루어진다. 우리 모두는 크든 작든, 누군가를 평가하고 누군가가 내놓은 생산물을 평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평가는 포스와 같다.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는 평가를 강요받고, 또 강요하며, 그걸 권리처럼 누리기도 한다.
평가의 거미줄을 걷어내는 건 불가능하고, 그걸 벗어날 수도 없다면, 우리는 거미줄 위를 불편함 없이 다닐 수 있는 거미가 되어야 한다. 매사에 잘 평가하자는 거다. 그러면 사는데도 훨씬 유리해진다.
평가는 옷을 고르듯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옷은 다양한 용도에 따라 품과 기능이 다른 걸 선택해야 하듯, 평가도 그렇다. 예를 들어, 인간관계에서는 박한 평가보다, 건조기를 생각해서 조금 큰 사이즈의 티셔츠를 고르듯 좀 넉넉하게 평가하는 게 좋다. 단점보단 장점을 부각하고, 뭐라도 배울 점을 찾는 게 좋다. 공적,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이빙 슈트처럼 빡빡한 평가가 필요하다. 사인과 공인, 평가의 품이 뒤바뀔 때 문제가 발생한다.
사실 가장 잘 평가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외부를 향한 좋은 평가의 시각과 자세는 자신을 평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엄밀함, 객관화, 유연함은 오랜 훈련에서 나오고, 훈련의 대상은 자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해서는 가급적, 국회에 나온 공무원이 취하는 태도를 갖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제가 그 부분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되뇌는 것이다. 그 말은 평가 중독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좋은 평가자가 되고 싶다. 사람도, 사회의 여러 이슈도, 첨예하게 부딪히는 사안도 잘 평가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훈련해야 한다. 그렇다고, 세상에 평가할 것밖에 없는 것처럼 굴고 싶진 않다. 평가하지 않아도 가치를 알 수 있는 게 세상엔 많다. 곱씹지 않아도 마음 언저리에 따뜻하게 와 부딪히는 것들. 좋은 평가자는, 어떤 부분에선 가급적 평가를 유보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지금까지 평가를 평가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