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세는 이유 (1)

by 담결

"안녕하세요. 2학년 한유진입니다."

세미나실까지 급히 달려오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한유진'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한여름에 혼자 롱패딩을 입고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밀어닥쳤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더라. 굳이 시작점을 꼽자면 개강 첫날 아침에 받은 교수님의 메일 한 통부터였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쉬운 돈벌이 수단이 생겼다며 기뻐했던 내가 문제였다.


꿀 같은 방학이 끝나고 개강을 맞은 날, 나는 혼자 아침에 일어나 조용하기 그지없는 집안에서 적당히 냉장고에서 반찬을 몇 개 꺼내 밥을 차려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음식을 한 입 넣을 때마다 착실하게 1부터 숫자를 세면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식탁 귀퉁이에 놔둔 휴대폰 화면에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떴다. 알림 팝업을 눌러서 내용을 확인해 보니, 지도교수님으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이지민 학생에게


이번 학기 2학년 전공 해석학개론 2 강의에서 튜터로 활동할 학생이 필요한 상황인데, 혹시 지원해 보는 거 어떤가요? 튜터들에게 소정의 장학금도 지급될 예정입니다.

고민해 보고 튜터 활동 수락 여부에 대해 회신해 주세요.


김혁수 드림


안 그래도 이번 학기에 전액장학금을 타서 등록금은 해결했지만 여기서 돈을 어떻게 더 벌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이었는데, 너무나 시기적절하게 좋은 제안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해 볼 필요도 없이 바로 튜터 활동을 하겠다고 답장을 썼고, 글자수가 짝수가 맞는지까지 완벽하게 확인한 후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갑작스러운 희소식을 맞아 글을 읽고 쓰는 데 집중하느라 그전까지 음식을 입에 몇 번이나 넣었는지 세고 있던 숫자를 까먹은 것이다. 뭐였더라. 아, 그래 5까지였지. 머릿속으로 6, 7, 8라며 잊지 않고 착실히 숫자를 세어가면서 남은 밥을 순차적으로 먹었고, 한 숟가락 양보다 조금 더 많이 남은 밥을 한꺼번에 숟가락에 올려서 모두 입에 넣은 후 15를 세었다가 멸치볶음을 한 젓가락 집어서 16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음식을 입에 넣었다. 식사를 모두 마친 후 그릇과 반찬통을 다 정리하고서 방으로 돌아가 학교로 갈 채비를 하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솔직히 나의 대학교 생활은 꽤나 만족스럽다. 일단 공리*와 정리*들이 논리적이고 유기적으로 아름답게 연결되는 점에 흥미를 잔뜩 품고 수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했기에, 학업에서 더할 나위 없는 재미를 느끼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중간에 군대를 다녀오고 현재 3학년 2학기를 다니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가 밀레니엄 문제를 증명하거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정도의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건 뼈저리게 알고 있다. 하지만 전공 공부에서 그럭저럭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학업 성적도 나쁘지 않고, 결과적으로 장학금을 받아가며 학교를 다닐 수 있으니 부모님에게 돈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럽다. 이렇게 남은 3학기를 다 다니고 졸업하고 나면 더더욱 경제적인 독립을 안정적으로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바라는 미래까지 머릿속에 그리며 이번 학기까지 포함하여 남은 학기들이 순탄하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9월 둘째 주에 소집된 첫 번째 튜터링 모임에서 한유진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공리(axiom): 논리학이나 수학 등의 이론체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근거가 되는 명제.

*정리(theorem): 공리를 기초로 증명된 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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