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야5

by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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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리대가 필요했다. 나는 돈이 없지 않은가. 전당포에 맡길 물건이 없을까.. 그때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세이코 손목시계.
"먹을 것 좀 사올게." 내가 헛간을 나가려하자. 그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찾더니 동전과 지폐 몇 장을 건넸다.

“목이 마르니까 막걸리를 좀 사다주겠어?”

3750원. 의외였다. 얌전한 얼굴로 술을 부탁하다니. 돌연 입장이 바뀌어서 술심부름을 하게 된 난 피식 웃음이 났다.

"좋아. 안주는?"
"새우깡?"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서둘러야했다. 전당포가 문이 닫기 전에 세이코 시계를 맡기고 돈으로 바꾸어야하니까.

나는 먹을 것을 가지고 오겠다는 구실로 헛간에 그를 두고 나오려다가 돌아서서 내 셔츠를 벗어서 그의 두 손을 묶었다. 그리고 서둘러 헛간을 나섰다.
다행히 세이코 손목시계를 전당포에서 받아주었다. 생리대를 사고, 빵과 음료수를 샀다. 그리고 약국에 들려 진통제도 사야했다. 생리 이틀째는 허리를 펼 수도 없을 만큼 아프기 때문이었다. 진통제를 사고 어두워지는 권청색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하는데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흩어진 머리칼이 뺨 위로 흐르는 눈물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플라터너스 나무에서는 손수건만한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가로등 불빛을 산란시켰다. 차도 위를 달리는 자동차 불빛과 신호등의 붉은빛이 눈물에 번져 시야에서 너울거리는 걸 손등으로 쓱쓱 지웠다.

헛간에서의 밤은 여름이라고는 해도 해가 지자 조금 추웠다. 축제가 되면 호스에 띄우던 보트가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나는 보트를 헛간에 놓고 그 안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맨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어쩌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벽에 기대어있던 보트에 잠자리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한잔 할래?”그가 막걸리 병을 들어올려 나에게 권했다.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가슴 깊이 담배를 빨아들이자 그의 볼이 홀쭉해졌다. 그는 천정을 향해 천천히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신기하게도 담배연기는 허공에서 동글동글 해졌다.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초월하려는 의지로 담배연기 구름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얗고 둥근 링은 점점 커졌다가는 마침내 허공에서 사라졌다.

“좀 자두는 게 좋을거야.” 내가 무심하게 말했다.
“왜? 오늘은 그냥 자게? 역할극은?”그가 말했다. 약간 빈정거리는 투였다.
“새벽에 깨울 거야. 자두는 게 좋아. 난 새벽에 가위에 눌려 깨니까.”
“소변이 마려운데.” 나는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흠칫 놀랐으나 안 들리는 척 했다.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헛간 구석으로 가서 볼일을 보고 돌아왔다. 나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걸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대로 그를 두고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이렇게 하자. 네가 뭘 원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런데 사람은 어린시절의 상처를 사는 동안 평생 짊어지고 산다고는 해.” 그가 말했다.

나는 보트 안에 들어가서 그제서야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손등과 팔뚝 위로 불거져나온 힘줄이 울퉁불퉁 튀어나와있다. 힘든 일을 많이 한 손이다. 하얀 티셔츠 위로 불쑥 나와 있는 목이 금방 꺾일 듯이 보이는 건 그만큼 어깨가 넓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움직이는 목젖이 신기해서 손을 대보고 싶기도 했다.

“내가 좋아했던 애는 중학교에 가고 난 한해 쉬었거든. 집에 일이 좀 있었어. 아버지가 아프셔서 어머니를 도와야 살 수 있었거든. 산에서 나무를 하고 내려오는데 그 애를 만난거야. 뭐, 어쩔 수 없이 지나쳤지. 지게를 진 나를 보는 눈이 우는 것 같았어. 난 무시했고. 사는 동안 난 그때를 잊지 못할 것 같아. 나중에 나도 혼자 울었으니까. 네가 어떤 상황인지 잘은 모르지만..”
그의 말은 정직해서 듣기 좋았다. 나는 보트에서 돌아누웠다. 그는 내가 듣고 있는지 마는지 상관없이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밤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자리에 드는 기분은 평화로웠다.
photo by lam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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