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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에서 잠을 청하긴 했지만, 쉽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생리를 하는 날은 밤에 일어나 두어 번 생리대를 갈아주어야만 새지 않는다. 잠자리가 신경 쓰여 언제나 옅은 잠밖에 잘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나직한 이야기에 어느새 옅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때였다. 보트를 툭툭 차며 그가 나를 깨웠다.
“뭐야, 생판 모르는 남을 끌어다가 놓고 잠이 와? 일어나봐. 일어나서 그 뭐야, 역할극이라는 걸 해보란 말이야.”
손목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와서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는 듯 하더니 나를 자극했다. 긴장해있던 나는 어린시절 의붓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살림을 부수며 폭력을 휘둘렀던 기억이 되살아나 몸을 떨었다. 그는 취해있었다. 그리고 사나워졌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는 척 하다 그를 덮쳤다. 그의 가슴을 깔고 앉아 두 팔을 무릎으로 제압했다. 그리고 팔뚝으로 그의 목을 누르며 말했다.
“그만 둬. 난 소리에 예민하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차는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나.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내 의붓아빠도 나를 그렇게 대했지. 내가 작고 약하니까 아무 때나 소리지르고 함부로 물건을 집어던지며 날 공포에 떨게 했어. 또 한번 소리치면 죽여버릴거야!”
나의 기세에 눌린 그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네가 얼마나 괴로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도 너만큼 이유없이 학대당하고 있거든? 날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라면 이제 슬슬 그 역할극을 시작하지 그래. 나야 며칠 동안 사라진다해도 찾을 사람도 없고, 걱정해 줄 사람도 없으니까 도망칠 걱정은 하지마.”
그의 입술에서 피가 났다. 아까 보트에서 그를 덮칠 때 다친 듯 했다. 나는 서서히 그를 제압한 팔뚝에 힘을 풀고 일어났다. 그의 손목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망설였으나 애초에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입에서 나와버린 역할극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헛간을 둘러보니 먼지떨이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떨이를 가져와 앉았다. 그리고 숱이 많은 여자의 머리카락 같은 먼지떨이를 하나로 묶었다. 먼지떨이의 술과 나무막대를 잇도록 꽁꽁 묶은 붉은 테이프가 얼굴 모양이 되었다. 나는 인형놀이를 시작했다.
“아빠, 놀아주세요.”
그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인형놀이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내가 다시 말했다.
“아빠, 오늘은 이상하게 라면이 먹고 싶어요. 아빠? 제 말 듣고 있어요?”
나는 그가 응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결심했다는 듯이 셔츠를 벗어서 자신의 왼손에 감더니 권투 글러브처럼 쥐고 잽을 날리는 연습을 한다.
“안 돼. 아빠 지금 운동하는 거 안 보여?”
나는 먼지떨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왜? 뭐가 잘못됐나?”
“어린시절 학대당한 나를 위로하려면 ‘안 돼’라는 말은 도움이 안 돼.”
“아, 그런가? 그럼 다시 하자.”
나는 다시 먼지떨이 인형을 들고 말한다.
“아빠, 놀아주세요.”
“그래.”
그가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내 안의 아이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뭐해? 내가 ‘그래’라고 했잖아.”
나는 먼지떨이 인형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안 되겠어.”
그도 왼손에 둘둘 말았던 셔츠를 풀며 싱겁게 웃었다.
“할 수 없지. 네가 가위에 눌려 아이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거야? 근데 손목시계는 어쨌지? 아까 본 것 같은데.”
난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뒤로 감췄다.
“아, 아까 빵을 살 때 전당포에 맡겼어.”
“그럼 말을 하지. 내 것도 맡기게.”
그가 손목시계를 한 손으로 풀어서 나에게 건넸다.
“학교 앞 전당포지? 나도 가끔 시계를 맡겼다가 찾고 그래. 아마 들고 가면 알아서 주실 거야.”
“뭐가 필요한데.”
“담배 한 갑하고 십자말 풀이집 정도? 그리고 볼펜. 설마 하루종일 역할극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좋아. 아침이 오면 갔다 올게.”
난 보트로 돌아가 누웠다. 시계는 이제 내 손에 있었다. 그가 손목에 차고 있었던거라 따스했다. 막 새벽 3시 1분이 지나고 있었다.
photo by lamb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