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야 8

by 이은주

9
호수 저편으로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헛간 문틈으로 살피는 내 등 뒤로 인혁이라는 남자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곳은 낙엽을 치우거나 눈을 치울 때 이외에는 출입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설사 있다고 해도 작년 겨울 아르바이트를 해서 경비아저씨들은 다 아는 처지니까 내가 여자친구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돼. 그런데 담배는? 이 손 좀 풀어주지 그래.”

배낭에서 담배와 십자말풀이집을 꺼내서 건내준 후 바지 주머니에서 그의 손목시계를 꺼내 돌려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돌려받은 시계를 손목에 찼다. 그때 한낮의 소나기가 쏟아졌다. 흙이 파질 정도로 쏟아졌다.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인 그가 허공에 만든 둥근 링이 허공에 여러 개 엇갈리며 공회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앞에 하숙집에서 가져온 플라스틱 통에 담긴 밥과 김치와 멸치볶음이 든 것을 두고 보트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가 천천히 플라스틱통을 흔들어 비비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맛있게 먹는 소리도 났다. 그는 아무 감정도 담지 않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의 태연한 태도에 짜증이 났다. 끈적끈적한 더위와 헛간에 켜둔 백열등이 높은 천정 구석구석에 있는 거미줄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밥을 다 먹은 그가 천천히 기타를 끌어다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후의 햇살은 소나기 덕분에 더욱 쨍쨍하게 내리쪼였다.
“손목시계를 다시 찾아왔군. 내 시계는 왜 맞기지 않았지? 전당포 형은 꽤 후하게 쳐주었을텐데.. 어차피 시계를 맡기려고 했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밤부터 긴장된 채 보트에서 불편한 잠을 잤기 때문에 피로했다. 그가 말했다.
“새벽이 오면 내가 깨울게. 그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네 안의 아이가 위로를 받고 더 이상 너를 괴롭히지 않을까? 한번쯤 누군가의 생명과 관계된 일을 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안 그래?”
“모르겠어. 나는 자주 나쁜 꿈을 꿔. 전쟁을 하다 적에게 쫓겨 도망치기도 해. 수술대 위에 누워서 수술을 받기 직전에 달아나기도 하고 역시 의붓아빠에게 맞았던 그대로 꿈속에서 재현되기도 해. 그때 나는 아주 어린시절로 돌아가 있지.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고, 내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잠을 깨면 나는 점점 기분이 다운이 되는거야. 일어날 수도 없고 무서워서 다시 잠들 수도 없는 상황. 벽을 보고 누워도 숨쉬기가 힘들어서 다시 일어나 앉아있기도 해. 정말 더러운 기분이야.”
“그래? 그럼 먼저 진짜 아빠가 있다고 설정을 하자. 그리고 네가 어렸을 때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떠올려봐. 친구 아빠를 떠올려도 좋고.”
“난.. 친구가 없어. 있다고 해도 친구집에는 가본 적도 없어.”
“그럼 이 도시락은 누가 싸줬지?”
“그건 하숙집에서 내가..”
“생각해봐. 하숙집 주인아저씨를. 그분도 아버지일 거 아니야.”
나는 명절이나 생신에 다녀가는 시집간 두 딸을 알고 있다. 과묵한 아저씨는 하숙생들에게도 그렇지만, 딸들에게도 그다지 다정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아버지상은 아니야.”
“그럼 네가 바라는 아버지상은 뭐지?”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드라마 ‘초원의 빛’에 나오는 로라 아빠야.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들 곁에 있어주고,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보호하고, 사랑해주고, 믿음을 주는 그런 아빠.”
“그럼 되었네. 역할극을 할 때 내가 너의 그 로라 아빠가 되는거야. 그리고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하는거지. 그리고 의붓아빠는 가능하면 잊어버리도록 하는거야.”
“아니, 네가 몰라서 그래. 잊어버릴 수 없으니까 꿈에 나오고, 잊어버릴 수 없으니까 가위에 눌리는거라고.”
이야기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말없이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보트 가까이로 걸어왔다. 나는 흠칫 놀랐지만,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노려보았다.
“나야말로 널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보트 저쪽에 앉는다면 내가 보트 이쪽에 좀 앉을게. 비가 와서 그런지 바닥이 눅눅해서 앉아있을 수가 있어야지.”
내가 동의하기도 전에 그는 보트 안으로 들어와 마주보고 앉았다.

photo by lam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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