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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29. 2019

정신승리법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이전의 희망 이야기는 전부 쓸어내어 버려야만 한다. 그 누구의 것이든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가면은 모두 찢어버려야만 한다. 그 누구의 것이든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수단은 모두 배척해야 한다." (루쉰, 1925년)


정신승리법(精神勝利法)은 중국의 작가이며 비평가인 루쉰이 1921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 '아큐정전'(阿Q正傳)에 나오는 말로, 소설의 주인공인 아큐(阿Q)의 독특한 사고방식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아큐'는 동네 깡패들에게 무참하게 몰매를 맞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들한테 맞은 격이다. 아들뻘 되는 녀석과는 싸울 필요가 없으니, 나는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  


자존심에 상처가 되는 일을 당할 때면, 어떤 이유든 만들어 내어 자기 탓이 아닌 남의 탓으로 돌리고 애써 아픈 기억을 묻어 버린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비굴하며, 자기보다 못하거나 비슷한 처지로 생각되는 약자에게는 위력을 행사하며 폭력 휘두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굴욕을 당한 뒤에 지나가는 비구니에게 불꽃같이 타오르는 적개심을 드러내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한 번은 아큐가 도박판에서 제법 큰돈을 딴 적이 있었다. 그때 공교롭게도 노름꾼들 간에 시비가 붙어 대판 싸움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아큐는 실컷 두들겨 맞고 딴 돈까지 모두 빼앗겨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큐가 취한 행동은 이렇다.  


"새하얗게 번쩍번쩍 빛나는 은화 더미! 더구나 그의 것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이다. 자식 놈이 가져간 셈 쳐 보아도 역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도 이번만은 실패의 고통을 조금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힘껏 자기 뺨을 두세 차례 연거푸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때린 후에 그는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는데, 마치 때린 것은 자신이고, 얻어맞은 것은 또 다른 자신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 같이, 비록 아직도 얼얼하지만,  몹시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드러누웠다. 그는 푹 잠들었다." 


정리하자면 아큐의 '정신승리법'이란, 아큐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때마다 자신이 당한 수모, 굴욕, 패배 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합리화하거나 정당화시킴으로써 자신이 승리했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정신승리법은, 이솝우화의 '여우와 포도'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보호하는 심리적 방식에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아큐의 정신승리법은 현대인에게 필요한 긍정적인 일면도 다소 있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 상황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또는 당면한 현실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정신승리법이든 자아 방어기제로서의 자기 합리화 혹은 자기 정당화라는 심리적 메커니즘 혹은 망각의 묘약이든 간에, 일시적인 심리적 위안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상태의 상한 마음에서는 결국 상처 그것 때문에 훼손된 상한 생각, 왜곡된 생각만 거듭 나올 뿐이다. 그 어떠한 양태나 양상이든 간에 문제를 문제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더욱이 문제에 직면하지 않고서는, 해결책이 나올리는 만무하다. 문제가 미해결의 상태로 계속 남아 있는 것, 이게 더 큰 문제다. 심리 치유에서,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치유의 역동과 회복의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다.  


"모처럼의 통찰도 그들이 그전에 생활해 오던 실제적인 상황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실제 생활에서 행동의 변화 없이는 사실상 아무런 실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실제와 동떨어진 통찰은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에리히 프롬, '소유나 삶이냐')


루쉰은 정신승리법의 결말이 어떠한 것인가를 비극적으로 그려 내었다. 아큐는 나름의 독특한 정신승리법으로 그나마 자신의 실낱같은 자존심을 지켰지만, 끝끝내 경멸과 굴욕과 수모로 점철된 밑바닥의 삶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결국에는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일에 휘말려 사형을 당하고 만 것이다. 


아큐정전은 1921년 신문지상에  발표되었다. 거의 100년 전이다. 루쉰은 신해혁명 당시에 시대의 변혁에 따라가지 못하는 중국 인민들의 노예근성적인 자기도취의 사고방식을 '아큐정전'을 통하여 신랄하게 풍자하였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현재 우리 사회 현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아큐의 정신승리법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어제, 검찰의 조국 영장 신청 기각에 관한 언론 보도기사를 눈여겨보다가, 조선일보의 기사 제목이 하 수상하여 기사를 읽어 보았다. 조중동과 종편 그리고 재벌의 찌라시 언론인 각종 경제지의 보도기사는 평소엔 제목만 훑어 지나칠 뿐 '그러려니'하고 넘겨버린다. 기사를 읽어보니, 참 대단한 정신승리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대부분 언론들의 논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하튼 조중동과 그의 아류들이 제목으로 나 같은 사람의 흥미를 끌었으니, 어떤 면에선 성공적인 '정신승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판사 출신 김봉수 성신여대 법대 교수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국 영장 실질심사는 KO 승부는 아니지만 검찰이 좀 많이 이긴 판정승"이라면서 "장관도, 검찰의 최종 목표도 아닌 조국의 구속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 검찰은 이번 사건에서 목표의 90%를 달성한 것"이라고 적었다."(조선일보 12월 27일 자 기사)


"검찰의 최종 목표가 무엇일까?" 이런 의문은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 꽤 많은 지식인들이 집단지성으로 이미 간파하고 지속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바 문재인 대통령의 촛불 정부를 겨냥한 소위 '검찰 쿠데타'라는 말속에 함축되어 있다. 쿠데타는 프랑스어로 '정부에 타격을 가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무너뜨리거나 빼앗는 군사정변(軍事政變)을 지칭한다. 옛글에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이 보이지 않고, 돈을 움켜쥐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逐鹿者不見山 攫金者不見人)"라는 말이 있다. '기호지세'(騎虎之勢)라는 사자성어도 있다. 사람이 얼결에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달리는 형세'라는 뜻이다. 상상하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호랑이 등에서 내리자니 잡아먹힐게 뻔하고, 계속 타고 있자니 무섭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오직 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뿐이다. 스트레스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 그저 호랑이의 기세에 운명을 맡기고 갈 데까지 달리는 수밖에 없다. 인용한 옛 글들이 시사하는 바가 모두 현재 검찰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도 정신승리법은 다른 사회적 현장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조국 사태에 검찰과 조중동과 자일당과 일본의 아베와 언론을 다섯 축으로 하여 난무하는 온갖 억측과 신념과 확신과 소신과 주장과 망언에서, 그리고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뜬금없는 이스라엘기가 동시에 휘날리는 자칭 애국 집회와 구국기도회의 현장에서, 또 자칭 지성인, 선생, 학자, 전문가 혹은 시인, 작가, 진보논객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평소 그들이 논하거나 주장했던 바와는 사뭇 괴리가 있는 이율배반적이고도 비논리적인 글들에서, 정신승리법의 망령을 본다. 다시 말해 정신승리법이 활개 치는 현장에서는 선악이 자리를 바꾸고 흑백의 색깔이 뒤바뀌며, 자신의 신념으로 내뱉은 말까지 부정되며, 진실과 거짓 혹은 주객이 전도되는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지(無知) 한 사람이 신념이나 소신을 가지거나 혹은 억측하여 확신을 가지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무지(無知)의 사전적 뜻은, '① 아는 것이 없음. ②미련하고 우악스러움'이다. 무지는 이른바 학력 혹은 학벌 또는 학위 등과 무관하다. 무지하다고 해서 사는 데에는 별 지장은 없다. 다들 그렇게 살아 가고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알려고 하거나 배우려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고 더 큰 문제는, 아는 게 전혀 없으면서도 무엇이든 '다 안다'고 착각하는, 맹목에 가까운 지적 오만에 있다. 한편으로 이성적으로 혹은 양심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또 잘못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짓을 나름의 신념과 소신을 가지고 계속하는 것은 분명 질이 아주 나쁜 사악한 일이다. 하물며 그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여 자신을 기만하고 심지어 대중까지 기만하고자 시도하는 일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해 아큐의 정신승리법이 "나와는 결코 무관하다"라고 감히 말할 자신은 내겐 없다. 때로 아주 가끔은 내게도 정신승리법이 필요한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비록 내가 속물근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졸한 사람일지라도, 속물과 무지의 표상이라 말할 수 있는 아큐 부류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사회 지도층과 식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정신승리법에 대해서는 특별히 개탄해 마지않는 가운데서도, 그것이 좋은 반면교사임을 분명하게 안다. 그래서 세상사든 인간사든 간에 더욱더 올바른 분별력이 절실한 세태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층 절실하게 느낀다.(20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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