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둘째를 임신했던 시점부터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으니, 대략 2020년 신년쯤부터였던 것 같다. 잦은 위경련으로 한 달이면 두세 번씩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낮이고 밤이고 없이 버거워지는 몸을 이기기가 힘들었다. 배는 불러오지, 위경련은 왔다 하면 토사광란이지...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났는지 모르겠다.
임신 중반부터는 치골통 때문에 포경수술한 남자처럼 어기적 어기적 걸어 다녔다. 치골통은 아기가 골반을 눌러 생기는 것인데 골반 뼈가 반으로 쫙쫙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매일 매 순간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임신 10개월을 위경련과 치골통에 몸부림치다 출산을 했다.
아기를 낳고도 두어 번 더 위경련이 왔던 것 같다. 그날도 응급실에 기어갔는데, 임신 중에는 찍을 수 없던 시티를 찍어줬다. 결과 상 속에 뭐가 보이니 내과를 가보라고 했다. 일주일쯤 뒤 내과에 갔고, 내과에서는 혈액종양내과에서 봐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러고 다시 예약을 잡아 혈액종양내과로 가 피검사를 했다. 피검사만으로는 알 수 없으니 속을 열어 조직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결국, 또 외과로 가 복강경으로 조직검사를 했다. 암일 수도 있지만 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상한 답변이 돌아왔다.
내 속에 있는 작은 덩어리가 뭔지 알아차리는데만 꼬박 5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온갖 생쇼를 다 한 병원에서는 속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어 서울의 전문 병원으로 옮겼다.
최종 진단은, 소포성림프종 2기였다. 그게 2022년 5월 마지막주의 일이었다.
다시 떠올리기 힘든 시간이었지만 혹시나 다가올 언젠가의 시간을 위해 기록을 해두고 싶었다. 만약 내가 없는 때가 오더라도 내 아이들이 엄마의 시선을 느꼈으면 했다. 내 살결과 시선이 없는 자리에 기록만이라도 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반년이 넘도록 작년 5월의 일을 떠올리는 건 힘든 일이었다. 글로 남겨두기가 힘들었다. 떠올리기가 힘들었다가도 떨치려고 하면 떨궈지지가 않는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기까지 1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을 생각했다. '어쩌다, 내가, 왜'가 가장 주된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날리는 만무한 일이다. 이 모든 걸 어떻게 인간 따위가 알 수 있겠는가.
어느 날은 덤덤했다가도 어느 날은 사무치게 슬펐다. 내가 안아보지 못할 아이들의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몸이 떨리게 슬퍼졌다. 너무 좋은... 사랑하는 저 남자가 나 없이 혼자 잠자리에 들고 혼자 밥을 차려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힘이 들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갖고 싶은 것 한 가지는 남은이의 슬픔이었다. 남겨진 이의 슬픔도, 눈물도 다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결국은 내 안의 작은 덩어리가 뭔지 밝혀내지 못한 병원에서 의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도 고형암이 아닌 게 어딥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따지는 것도 기운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병명을 밝히기까지 5개월의 시간 동안 나는 그 병원에서 너무 질려버렸다. 나중에는 병원만 가도 혈압이 200씩 올라갔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무슨 검사를 받을래도 혈압이 너무 높아 심장 검사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내가 지금 암일 수도 있다는 말에 심장이 뛰어서 그렇지 평소에는 정상이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심장 초음파를 마치고 나자 심장내과 의사는 이참에 심장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걸로 좋게 생각하자는 뜬금없는 소리를 해댔다. '내 몸에서 일단 심장은 정상이구나'하며 안도했어야 하는 일인가... 싶었다.
그런 말이 있다. '사람이 한만큼 받는다.' 암환자가 되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아... 그동안 내가 하도 아빠가 죽기를 바라서, 이제 내가 죽게 생겼구나'라는 생각.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죄를 지은건 내가 아닌데 벌은 내가 다 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죽어 없어져 아빠에게 주고 싶었던 형벌을 이제는 내 딸들과 남편이 함께 받을지도 모른다는 게 억울하고 슬펐다.
그렇게, 나는 암환자가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