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세, 동네 한 귀퉁이에서 작은 책방을 시작했다. 큰아이 7살, 작은아이 3살이었다.
아이들 키우는 것만으로도 버겁던 시기였을텐데 그렇게 무리수를 둬야 직성이 풀렸다. 난 이제 40대 중반이 되었고 큰아이는 고등학생, 작은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고 그 때 둔 무리수를 여전히 감당하고 있다.
책방을 하며 보람 있는 날들도 있지만 때론 이렇게 늙어가는 건가, 내 젊음을 어문데 소모하는 건 아닌가 싶은 불안감을 느끼는 날들도 많았다. 그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책방을 하며 스쳐 지나가는 단상들을 붙잡아 글자로 남겼다. 무형에서 유형으로 만들 수 있는 것중에 글만 한 것이 또 어디있을까.
소모가 아닌 축적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어차피 돈도 축적되지 않을 바엔 글이라도 축적하자며 조금씩 모으기 시작한 글이었는데 이제 책한권이 될만큼 쌓였다.
매일 아침 책방 문을 여는 날들 속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여러 번 지나갔다.
'사계'가 뚜렷하다고 해도 계절은 하루하루 서서히 변하기에 다음 계절이 성큼 오고 나서야 지난 계절이 끝났음을 알게된다. 계절처럼 삶에서 스쳐지나는 모든 것은 지나간 후에나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사계절을 다 지나고 나서야 1년이 지났음을 몸으로 느끼듯이 모든 계절은 경계 없는 하나의 흐름이다. 어느날 문득, 책방을 해온 10년이란 시간도 나에겐 한 계절 같았다. 책방이라는 계절. 그 계절을 지나는 동안 많은 날씨를 겪으며 내 안에 나이테가 만들어졌다. 내가 겪는 계절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시공간에서 각자의 고유한 계절을 지난다는 당연한 사실을, 긴 시간 책방을 하며 겨우 깨달았다.
책방이란 공간에서 만나는 수많은 접점들로 나란 인간의 '모남'과 '못남'을 매일 마주할 수 있었고 10년 전보다 조금이나마 유연한 인간이 되었다면 다 책방이란 계절의 열매들이다. 그 계절을 지나며 본 풍경들을 생생하게 쓰려고 했지만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재처럼 푸석한 글들만 남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가 다 아는 공주이야기, 신분상승의 대명사 '신데렐라'의 독일어 원어는 '아셴푸텔(Aschenputtel)', 직역하면 '재투성이'이다. 그간의 재투성이 같은 글이지만 누군가의 계절에 닿아 신데렐라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