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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Feb 28. 2019

첫문장으로 유혹하고

“됐다. 그만 들어가라!”


학창시절, 음악시간. 딱 한 소절만 불렀을 뿐인데 음악 선생님은 그 아이의 음악인생 전부를 파악해 버렸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두 효과’ 때문이다. 먼저 제시된 정보가 이후에 알게 된 정보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초두 효과’는 3초 만에 상대방에 대한 스크리닝이 끝난다고 해서 ‘3초 법칙’, 처음 이미지가 단단히 굳어 버린다는 의미로 ‘콘크리트 법칙’이라고도 한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첫인상 효과’라고도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냉정하다. 호기심과 관심을 유발하는 첫 문장으로 독자를 유혹해야 한다. 첫 문장, 첫 문단이 매력적이지 않은데도 참고 끝까지 읽을 만큼 인내심이 많은 독자는 별로 없다. 제목이 마음에 와 닿지 않거나 첫 문장에서 강렬함이 느껴지지 않으면 곧바로 다른 책으로 갈아탄다. 기업이나 대학에서 인재를 뽑을 때 중요한 잣대로 사용하는 ‘자소서’ 도 마찬가지다. 수백, 수천 편의 자소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래서 첫 머리가 강렬하지 않으면 안타깝지만 다른 사람에게로 바톤을 넘겨야 한다. 소설이나 에세이도 마찬가지다. 첫 문장에서 눈길을 끌지 못하면 매대에 놓인 책을 집까지 데려오기가 쉽지 않다. 출판사나 저자가 제목에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첫 문장은 작가들에게도 고민이다.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은 13년을 고치고 고친 끝에 탄생했으며 김훈은 <칼의 노래>를 쓸 때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꽃이’ 와 ‘꽃은’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조사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작가의 고심이 묻어있는 일화다.     


첫 인상이 좋으면 다음에 또 만나고 싶어지는 건 인지상정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간단한 첫 문장에는 그 문장을 읽게 만드는 것 말고 또 어떤 역할이 있을까? 바로 두 번째 문장을 읽게 만드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카피라이터 조셉 슈거맨이 저서 <첫 문장에 반하게 하라>에서 한 조언이다. 첫 문장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다음 문장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막막한 흰 여백에 깜박이는 커서를 보며 망연자실했던 경험 앞에서 첫 문장을 쓰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글쓰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주처럼 넓고 광활한 흰 종이 위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서 무한의 공간을 홀로 횡단해야 하는 외로운 작업이다. 첫 문장은 그 횡단의 발자국을 떼는 일이다. 그래서 더 어렵고 막막하다. 하지만 고민만 하다가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백 가지도 더 생각해 낸 뒤 글쓰기에서 물러나는 일 외에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그래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쓰는 행위를 하는 동안에만 우리는 ‘쓰지 않는 사람’ 에서 ‘쓰는 사람’ 으로  모드변환이 이루어진다. 일단 아무 문장이나 쓰자. 시작이 중요하다. 첫 문장이 있어야 두 번째 문장이 있고 몇 개의 문장이 생기면 하나의 문단이 된다. 문단이 모이면 영원히 공백으로 남을 것만 같았던 여백도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한다. 독일의 작가 토마스 브루시는 “첫 문장과 함께 돌은 굴러가기 시작한다”고 했다. 첫 문장과 함께 돌이 굴러가고 굴어간 돌은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매력적인 첫 문장, 눈길을 잡아두는 첫 문단을 쓸 수 있을까? 창의력의 아이콘이 된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연설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명연설로 기억되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내용을 한 두 문장으로 간결하게 요약해서 제시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이곳에서 여러분의 졸업식에 함께 하게 되어 매우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제 삶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딱 세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라 아니라고 했지만 스탠포드 학생들은 잡스의 얘기에 귀 기울이며 잡스의 인생 속으로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가장 쉽고 친절한 방법인 개요로 첫 문장과 문단을 시작한 경우다.     


퇴근하고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 후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와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의 여성이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다. 머리색깔만 보고 당연히 그 여자 아이의 할머니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이 후 몇 번을 더 마주치면서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대여섯 살 또래의 아이를 둠 직한 젊은 여자였다. 그 여성은 아이의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였던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첫 문장을 시작한 필자의 에세이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므로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고 독자의 호기심을 끌어내기도 쉽다.     


<진품명품>이란 TV 프로그램이 있다. 소장하고 있던 옛날 물건을 가지고 나와 가격으로 가치를 매기는 프로그램이다. 가격이 결정되는 지점은 아마도 스토리일 것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가 그 물건의 가치를 결정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물건은 당연히 높은 가격이 매겨진다. 낡아빠진 구시대의 유물이 천문학적인 숫자에 거래되는 이유는 ‘기능’ 때문이 아니라 물건 속에 담긴 ‘스토리’의 힘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을 활용해서 글을 시작하면 재미있고 생생하게 시작할 수 있다. 스스로의 목숨을 구한 <천일야화>의 세라자드처럼 이야기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우리 반에는 보육원이 집인 아이가 있었다. 그 친구 이름은 공주였다. 어린 마음에도 그 애가 딱해 보였는지 나는 공주를 자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같이 밥을 먹었고 학용품을 나눠주었다. 내 방에서 함께 소꿉놀이도 했다. 소풍날 엄마를 졸라 도시락을 두 개 쌌다. 하나는 공주 몫이었다. 공주는 평소에 말이 별로 없었다. 표정도 없었다. 내가 다가가면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공주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그 아이는 외톨이였다.     


어린시절의 스토리로 첫 문단을 시작한 필자의 글이다. 공주란 이름을 가진 친구의 사연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다음 문단이 기다려진다.     


이 외에도 핵심개념으로 시작하거나 전문가의 말이나 글을 인용하는 것도 첫 문장을 시작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유명인의 말과 글에 담긴 신뢰성을 담보로 자신의 논지를 펴는 방법은 쉽고 안전하게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고 간다.    


이제 첫 문장, 첫 문단을 완성했으면 쉬지 말고 계속 쓰는 것이 중요하다. 한 문장을 쓰고 난 후 읽어보고 고치고 철자법을 수정하느라 쉬어가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그냥 쓰는 것이 좋다. 원래 의도와 다른 글이 되었더라도 멈추지 말고 써야 한다. 마음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자유롭게 쓰다보면 어느덧 한 편이 글이 완성된다. 헤밍웨이는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했다. 극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정말이다. 여러 번 퇴고를 반복하다 보면 초고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흔적이 사라진다. 어차피 수정되고 삭제되고 새로 써야 될 글이므로 초고에 연연하지 말고 우선은 분량을 채우는 일이 중요하다. 수정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첫 문장은 처음에 쓰는 문장이 아니다. 글을 다 쓰고 난 후에 제일 앞에 두는 문장이 첫 문장이다. 중간 문장이 첫 문장이 될 수도 있고 첫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 될 수도 있다. 첫 문장이 바뀌는 경우는 허다하다. 글을 다 쓰고 수정을 거치고 나니 이 글의 첫 문장 역시 원래는 첫 문장이 아니었다.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시작이 반’이란 말은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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