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옷장을 가득 채운 검고 각진 옷가지는
태초부터 숨이 말라버린 나에게 갖추는 예의
검은 구두
검은 땅
검은 상자에 투영된 검은 그림자
매일 같이 주어지는 제 몫을 해내려
검은 캔버스 위에 검은 물감을 덧바른다
슥 슥
의미 없는 붓질에 원단은 차츰 무거워지고
스윽 슥
결국 생겨나는 건 또 하나의 검은 상자
캔버스의 한쪽 귀퉁이
무심코 발견한 붉은 점에 나는 붓질을 멈춘다
잠시 멈추어 보라 내게 보내는 신호 같아
그저 앞만 볼 줄 알았던 모가지가 삐걱대며 돌아가니
시선 끝에 네가 있다
아마 이 꽃잎은 너의 붓끝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네 캔버스 속엔 사계절을 담은 찬란한 풍경화
황홀경에 나는 드디어 첫 숨을 들이켠다
붉어진 뺨에 괜스레 너의 침범을 건드리니
황량한 대지에 결국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이제 나는 목이 마르다
이제 나는 견딜 수 없다
이제 나는 검은 땅을 박찬다
검은 구둣발에도 꽂은 채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