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에는

by 사서 B

사랑이라는 감정의 근원에 대해 고민할 때가 있었다. 긴 시간 연애하면서 서로를 안쓰러워 하는 마음이 강렬해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A는 내게 좋은 옷, 고급스러운 음식, 명품 가방 등을 사주지 못한것을 미안해하고 내가 저렴한 옷과 음식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안쓰러워 했다. 아이스크림 먹자는 말에 좋다고 웃었더니 이런 사소한 거에도 기뻐한다고 내가 안쓰럽다고 갑자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반대로 나는 내가 A의 발목을 잡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하려고 했던 공부를 다 하지 못하고, 블랙기업에 다니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추후에 나오겠지만 함께 살면서 전세사기에 휘말리기도 하고, 그냥 그 일련의 과정들이 다 나로 하여금 벌어진 일로 느껴져서 괴로웠다. 벼랑 끝을 걷던 내가 어느 순간 A의 발목을 붙잡고 진창으로 구를 것 같아 불안했다.

서로를 불쌍해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오랫동안 그것이 궁금했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나?


A는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다음 생에는 자기 딸로 태어나 달라는 말을 종종 건냈다. TJ성향이 강한터라 만약에, 다음 생에,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부모 자식 관계는 끊어낼 수 없는 영원한 관계니까, 다음 생에는 영원한 관계로 함께하고 싶다고 그랬다. 정말 A답지 않은 낭만적인 문장이었다.

언제나 잊을 때쯤 다음 생에 자기 딸로 태어나 달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했다. 그 날도 그 문장에 대해 다 잊어버리고 있던 찰나였다. 산책을 하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A는 다시 한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음 생이 있다면 자신의 딸로 태어나달라는 말을 했다. 종종 들어 이제는 익숙한 문장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간지러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나도 좀 다른 대답을 준비했다. A에게 계속 조금씩 얘기해보라고, 말에는 힘이 있다니까 혹시 모를 일 아니냐고 그랬다.


다음 생에는 내 딸로 태어나. (소근소근)


A가 갑자기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반복적으로 속삭이는 모습이 웃겨서 나는 또 걷다 말고 깔깔 웃었다.


그래. 그때는 꼭 행복한 아이로 키워줘.

많이 안아주고 좋아하는 걸 아주 많이 해주고,

괴롭지 않은 해맑고 행복한 아이로 키워줘.


그 문장이 와닿을 때마다 하루하루를 낯설어하던 어린 날의 내가 다시 지금 현재에 불려왔다. 그 날의 나에게, 가슴 한 켠을 간지럽히는 애정을 직접 불어넣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는 했다. 그걸 그 순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A에게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딘가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고 막연하게 이야기 해줬다. A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 그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나도 담백하게 응. 하고 대답했다. 그냥 그렇게 또 산책을 했다. 날 좋은 어느 가을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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