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수많은 흑역사를 생성해 내고 나서야 내가 ‘알쓰’인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적당한 음주는 순기능이 더 많아 보인다. 어색했던 사이를 풀어 주기도 하고, 농담만 주고 받던 친구의 진지한 속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최고의 효능을 발하는 술잔은 퇴근 후 들이키는 그 날의 맥주 첫 잔이다.
그날 하루 동안 어떤 문제가 나를 괴롭혔든, 그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있든 없든, 오늘의 일과를 마치고 마시는 첫 맥주를 마시는 그순간만큼은 근심거리로부터 잠시 해방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Y는 나보다 반주에 진심인데, 집에서 한 잔을 기울이더라도 최상의 조건에서 맛있게 먹어야 한다며 글라스 서너 개를 항상 냉동실에 넣어둔다. 처음에는 참 유난이다 싶었지만 차갑게 얼려진 글라스로 맥주의 참맛을 경험했다. 지금은 설거지 후 군말없이 글라스 몇 잔은 냉동실에 고이 넣어둔다.
냉동 숙성된 글라스 속 맥주는 우리의 저녁식사 시작을 알리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의 저녁 준비 루틴을 잠시 소개하자면, 먼저 치열한 월드컵을 거쳐 배달요리를 주문한다. 그리고 오늘의 밥친구가 되어 줄 예능 프로그램을 각자의 콘텐츠 알고리즘을 한 발 양보하여 2인 만장일치로 선정한다. 요리가 배달되면 수저와 앞접시를 세팅하고 냉동실 속 글라스들을 꺼내 맥주를 따른다. 역전할머니의 살얼음 맥주 못지 않게 냉기가 서린 맥주를 한 모금 머물고서야 콘텐츠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요리의 첫 술을 뜬다.
맛있는 요리의 첫 입, 흥미로운 콘텐츠의 도입부, 시원한 맥주 한 모금. 짧지만 확실한 설렘을 주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