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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의 시작

정신 차려보니 일본

by 지안

지난 5년간의 회사원 커리어는 길지는 않았지만 꽤 화려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유니클로 일본 본사 1년, 피앤지 코리아 3년, 구글 코리아 1년- 마치 철저히 계획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처럼 보이는, 퍽 폼나는 외국계 세일즈 커리어였다. 내가 이런 커리어를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계획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내 꿈은 줄곧 변호사였다. 가장 가고 싶었던 대학도 고대 법대였지만 떨어졌고, 다른 법대에는 붙었지만 전공보다는 학교의 네임 밸류가 더 중요했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강력히 밀어붙여 연대 사회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 로스쿨 시험을 준비하려니 이번엔 엄마의 반대에 부딪혔다. 몸이 약한 내가 그 힘든 공부를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로스쿨에 가면 배경이 빵빵한 아이들이 대부분일 텐데 우리 집은 이렇다 할 배경도, 빽도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난 아파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공부를 해낼 자신이 있으며, 그깟 빽 없어도 괜찮다고 몇 날 며칠을 이불을 뒤집어쓰고 단식투쟁까지 했지만, 엄마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을 박차고 나가 혼자 힘으로 벌어먹으며 공부를 할 배포까지는, 솔직히 없었다.


홧김에 뭐 하는 데인지도 모르고 대충 써넣은 대기업 지원 서류들은 당연히 줄줄이 광탈했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지내던 어느 날, 친한 선배가 흥미로운 소식을 물어다 주었다.


“이따 오후에 유니클로 일본 본사 채용팀이 학교에 온대. 왠지 너한테 딱일 거 같아. 한 번 가봐.”


동시통역까지 대동하고 온 일본 인사팀의 방문 목적은 일본 현지 채용과는 다른 ‘글로벌 채용’이라는 특별 전형 채용을 위한 것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똘똘해 보이는 아이들을 선발해, 글로벌 점포 확장을 전두지휘할 수 있는 점장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지역을 대표하는 플래그십 점포에서 점장 직속으로 트레이닝을 받게 될 것이며, 집도 얻어주고 일본어 학습 지원도 무제한으로 해준다고 했다.


어차피 한국 대기업에 취업도 하기 싫었는데, 솔깃했다. 그렇게 일본이랑은 아무런 연도 없던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책에서만 보던 야나이 타다시와 최종 면접을 보고 있었다. 일본어로 화장실이 어딘지조차 물을 줄 몰랐던 나는 어찌어찌하다 그렇게 일본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본래는 도쿄에 터를 잡을 예정이었지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도쿄 대신 오사카 신사이바시의 플래그십 매장에 배정받았다. 일주일에 5일간은 매장에서 접객 업무를 하며 트레이닝을 받았는데, 손님 말을 못 알아들어 무시를 당하거나 엉뚱한 상품 위치를 안내해 혼쭐이 나는 게 일상이었다. 오기가 생긴 나는 매장에서 들리는 말은 뭐든 다 받아 적고 퇴근 후에 그날 적어온 것들을 모조리 외워버린 뒤에야 잠에 들었다. 출근하지 않는 이틀은 학원에 처박혀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종일 수업을 들었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공부하니 두 달 여만에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다 되었고, 여섯 달쯤 지났을 땐 일본어능력시험 1급을 거의 만점으로 통과했다.


매장에서는 발이 바닥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 총 800평 규모의 매장에는 수 백여 개의 상품이 있었고,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손님들의 문의에 대비해 늘 정확한 위치를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하루에 10시간 가까운 시간을 서있거나, 뛰어다니거나, 그것도 아니면 5층짜리 매장을 오르내리는 강행군이었다. 휴게 시간에도 맘 편히 쉰 적이 없었다. 틈틈이 학습일지를 쓰고, 점장 자격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시험일이 가까워졌을 무렵에는, 10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직원 매뉴얼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모두가 독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야말로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았다. 당시의 나에겐 목표가 명확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도 분명했기에, 그걸 쟁취하는 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트레이닝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외국인은 물론 일본인까지 포함해 ‘역대 최단기간, 최연소 점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어냈다. 나는 곧 도쿄 본사에 초대되어 백여 명의 외국인 스태프들 앞에서 내 경험담을 발표했다. 점장이 되어 맡게 될 점포도 금세 배정받았다. 도심에서 30분가량 떨어진 대형 쇼핑몰에 입점한 200평 규모의 매장으로, 신규 점장이 맡기에는 이례적으로 큰 규모였다. 하지만 그때의 난 두려운 게 없었다.


의외의 복병은 함께 일하게 된 부점장 세 명과 스무 명의 스태프들이었다. 특히 유니클로에서만 10년 넘게 일해온 부점장들은, 6개월 만에 점장을 달았다는 고작 23살짜리 외국인 점장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독대해 본 적 없던 본부장 같은 높으신 양반들이 걸핏하면 나를 만나러 매장으로 직접 찾아온 것도 그들의 속을 뒤집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 업무지시를 따르지 않았고, 사소한 일에도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했으며, 창고에서 내 험담을 하다가 걸리기도 했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들, 난 그저 ‘갑자기 굴러들어 온 외국인 돌’에 불과했다.


매장 레이아웃 변경을 두고 의견 충돌이 있었던 어느 날, 부점장 한 명이 손님들이 있는 매장 한복판에서 언성을 높였다. 점장실로 데리고 들어가자 본격적으로 발을 구르고 악을 지르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이 나오려는 걸, 이를 악물고 참았다. 두 발에 힘을 꽉 주고 똑바로 서서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 위경련이 나서 배를 부여잡고 간신히 걸음을 뗐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와락 터져 몇 시간을 서럽게 울었다.


점장으로 일한다는 것은 스태프를 대신해 총알받이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강성 고객들은 걸핏하면 ‘점장 누구야? 점장 나오라 그래!’를 시전 했다. 그렇게 불려 나가선 ‘뭐야? 너 일본인 아니야? 일본인 불러와!’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스태프의 실수로 도난방지침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은 채 제품을 포장해 드려 손님이 침에 찔린 일이 있었을 때는, 이러다 허리가 접힐 수도 있겠다 싶을 때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를 해야 했다.


그렇게 여섯 달 정도를 더 버텼다. 정신을 차려보니 몸은 여기저기 망가져있었고, 반복되는 위경련에 체중은 40킬로대로 떨어졌으며, 족저근막염으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내 몸을 망가뜨릴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답은 '아니다'였고, 그 순간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걸 알았다. 곧장 귀국을 결심했지만, 퇴사를 만류하는 회사를 뿌리치는 데에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임원진과 3:1로 맞짱을 뜨고 나서야 회사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그들이 혀를 내두르며 남긴 마지막 말은 ‘네가 일본어로 싸워서 이렇게 우리를 이겨먹을 줄은 몰랐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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