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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퇴사

살아지는 대로 살고 싶진 않아

by 지안

19년도 2월부로 나는 구글을 퇴사했다.

5년에 걸친 나의 월급쟁이 인생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기도 했다.


“퇴사하고 싶습니다.”


매니저는 이미 예상을 하고 미팅에 들어오신 듯했다. 테이블 위로 내년도 보상 패키지를 쓱 올려두시며 ‘신경 많이 썼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그 다운 멘트와 액션이었다. 페이지 가장 상단, 폰트 18 정도의 볼드체로 선명히 인쇄된 내년도 연봉 액수에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속물 같아 자존심이 조금 상했지만 다행히 그 외의 심경의 변화는 없었다. 매니저는 그 후로도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준비해 오신 몇 가지의 시나리오들을 풀어놓으셨지만 우리의 대화는 마치 창과 방패의 싸움 같았다. 그는 체념한 듯 마지막 카드로 휴직을 제안하셨지만 난 그마저도 단칼에 거절했다.


“회사원은 저에게 맞지 않아요. 제가 한 일보다 그걸 부풀려서 포장하고 저를 셀링해야 하는 게 늘 너무 힘들었어요. 사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자 매니저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반격하셨다.


“사업을 하면 회사원보다도 더 셀링해야 할 일이 많으실 텐데요.”


사실 그때 그 말은 너무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하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미 어떤 말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서 이 미팅을 무사히 마치고 공식적인 ‘퇴사 예정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지막 출근일은 대략 두어 달 후로 정해졌다. 그동안 나는 알고 지냈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커피챗을 했다. 평소엔 그렇게나 싫어했던 커피챗이었지만 퇴사일자가 정해진 마당에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에 그만한 게 없었다. 모두가 내 용기와 결단력이 대단하다며 추켜세워주었다. 나는 조금 우쭐해졌고, 모두가 꿈꾸는 퇴사를 내가 대표로 하게 된 것 같아 마치 승자가 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출근일이 다가왔다. 출근길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봤던 창 밖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하루를 보내고, 일찌감치 퇴근 준비를 마쳤다. 사람들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마지막 인사를 돌고, 자리를 깨끗이 정리했다.


노트북과 출입증까지 반납하고 나니 그걸로 정말 끝이었다. 텅 비어 가벼워진 백팩을 메고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마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겠지만, 동료들에게 미안하리만치 섭섭한 감정은 단 한 톨도 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십몇 층을 내려오는 동안 머릿속에서 폭죽이 펑펑 터지는 것 같았다. 1층에 도착해 로비 문을 시원하게 밀어재끼면서 생각했다.


이제 내 인생에서 월급쟁이는 끝이다!


가슴이 콩닥콩닥거렸다.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면 이런 기분일 거 같았다.


구글은 나에게도 한 번쯤 다녀보고 싶은 회사였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가보고 싶은 거긴 했지만. 모두가 최고로 좋다는 회사는 뭐가 좀 다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듣던 대로 구글은 최고의 회사임에 틀림없었다- 구성원들은 모두 스마트하고 상식적이었으며, 워라밸이나 복지 역시 듣던 대로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결국 회사는 회사였다는 것이다. 난 그곳에서도 행복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도 출근과 동시에 퇴근만 기다리는 건 똑같다는 걸 확인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주말만 기다리며 사는 삶은 이전 회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 평생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분명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 믿었다. 틀에 찍어낸 것 같은 월급쟁이의 삶에서 벗어나, 나에게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구글엔 정말 ‘이런 것까지 해준다고?’ 싶은 복지 혜택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썼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빨리 끊어내고 나가지 않으면 여기 눌러앉고 싶어질 수도 있겠다.’ 그 순간 겁이 덜컥 났다. 그래서 돌아갈 다리를 태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살아지는 대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구글에 다니면서 가장 위화감이 들었던 건 구글러들 특유의 ‘난 너무 똑똑해 난 너무 행복해’ 바이브였다. 그들은 모두 구김살이라곤 없어 보였으며,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데 늘 거리낌이 없고 확신에 차있었다. 특히 힘들었던 건 점심시간 구내식당과 카페에서 모두가 ‘밍글링’에 진심인 모습을 볼 때였다. 그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있을 때마다, 나는 정말이지 죽었다 깨어나도 여기에 진정으로 소속되긴 힘들겠구나 싶었다. 애초에 인생이 어찌 저리 행복할 수 있는 건지, 태생부터 나와는 다른 종족 같았다.


팀 전체가 함께 하는 커피챗을 가질 때면, 한 명씩 돌아가며 지난 주말엔 뭘 했는지를 말하곤 했다. 어느 식당에서 가족 모임을 했고, 부모님은 어느 대학 동문회에 다녀오셨고, 또 누군가는 강남 어디에 가 아이의 돌 사진을 찍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마치 ‘누가 누가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나’ 대회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은 가세가 기운 뒤로 가족 모임을 하는 일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였고, 부모님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니 대학 동문회에 참석할 일도 없었다. 돌 스냅사진 이야기에도 딩크인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내 차례가 다가올 때면 어떤 말로 적당히 둘러댈 수 있을지 두뇌를 풀가동해야 했다.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설령 내가 그들보다 ‘객관적으로’ 덜 행복한 상황이었다 해도, 나만 괜찮으면 그만이었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난 전혀 괜찮지 않았다. 200여 명의 직원들이 한 목소리로 ‘나 행복해요! 내 삶에 만족해요!’를 외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내 자존감 하나로 버티기엔 당시의 나는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구김살 하나 없이 팽팽히 펴진 이들에게는, 어떤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아픈 지점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차리는 ‘감수성’이 없다. 구글러들은 똑똑하고, 모나지 않았고, 심지어 모두가 ‘나이스’했지만, 그런 ‘감수성’은 없었다.


결정적으로 월급쟁이 생활에 마침표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어느 회사에서든 통용되는 생존 공식은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였다. 바로 조직에서 잘 나가기 위해선 ‘부풀리기’와 ‘보여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윗선의 눈에 띄려면 아는 것보다 더 아는 척을 해야 하고, 일한 것보다 더 많이 한 것으로 포장해야 했다. 나는 일 외의 다른 것에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게 몹시도 부대끼고 힘에 겨웠다.


자연히 나는 급하고 중요한 이슈가 아니면 미팅에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고, 덕분에 존재감은 늘 미미했다. 영어도 편하게 구사하고 말도 곧잘 하는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매니저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부하 직원이 윗선에 잘 보이는 걸 무엇보다 큰 보람이자 기쁨으로 여겼던 그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지적할 때마다 나는, 팀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가치 있는 말이 아니라면 굳이 하고 싶지 않다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했다. 몇 번의 논쟁을 거친 끝에 복장이 터져버린(!) 매니저는 내게 ‘미팅 중에는 항상 입을 벌리고 있으라’는 신박한 조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는 회사라는 조직에는 맞지 않는 사람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5년 동안 세 곳의 회사에 다녔지만 단 한순간도 ‘여기가 내 자리’라는 기분이 든 적이 없었다. 성과를 인정받고 높은 연봉을 받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늘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고, 혼자 겉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모두가 선망하는 회사를 가면 달라질까 잠시 기대를 한 적도 있었지만 역시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매일, 아니 회사에 있는 모든 순간이 괴로웠다. 허구한 날 체했고, 두통을 달고 살았으며,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회사 동료들은 나를 ‘짠망구’라고 불렀다. (짠한 할망구의 줄임말이다.) 하루 종일 가면을 쓴 채 힘에 부치는 줄타기를 마치고 퇴근하면, 좀비가 되어 집에 기어들어갔다.


더 이상 고민할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조직에 맞지 않으면 내가 떠나는 것이 맞았다. 퇴사를 하고 뭘 할지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다시는 회사원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것. 회사원으로 산지 정확히 만 5년을 채우던 해에, 나는 월급쟁이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백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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