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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굴

대환장 파티의 시작

by 지안

익룡에게서 벗어나면서 잠은 잘 수 있게 되었지만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익룡을 피하자고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퇴사하기 전부터도 우리 집은 이미 대환장 파티의 현장이었다. 엄마는 유방암 투병 중이었고, 나의 아빠라는 사람은 아내가 무려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집 밖으로 돌고 있었다.


회사를 다니고 있을 당시 엄마는 근무시간 중에도 수시로 카톡을 보내 아빠의 만행을 고하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엄마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길에 난폭운전을 해 엄마가 멀미를 했다는 비교적 사소한 내용에서부터, 너희 아빠가 또 며칠째 연락두절에 집에 안 들어오고 있다는 따위의 얘기들이었다. 연이은 미팅에 쳐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면, 엄마의 연락에 숨이 막혔다. 화를 삭이러 화장실로 숨어들었다가, 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죽여 울곤 했다. 카톡을 무시했으면 될 일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폭력적인 아빠에게 트라우마가 있던 나는 행여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미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아빠는 내가 집으로 들어가자 엄마를 돌볼 사람이 생겨 한결 홀가분해졌는지 아예 집을 나가버렸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엄마의 짜증을 받아내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엄마는 내게 아빠에게 연락해 그의 행적을 살필 것을 기대했다. 내가 거부하면, 너는 ‘하나뿐인 자식이 되어서 어찌 부모 문제를 중재하려 하지 않냐’고 가스라이팅을 했다. 난 그런 엄마에게 넌덜머리가 나다가도, 또 불쌍한 마음이 들어 뿌리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기를 반복했다. 아이처럼 보살펴줘야 하는 엄마와, 어떤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아빠라는 사람 사이에 껴서,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을 느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나는 내 처지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결혼하면 편안한 내 집에서 알콩달콩 살 줄만 알았는데 난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에서 시작해, 애초에 좋은 아파트에 살았더라면 층간소음에 그렇게 취약하지도 않았을 거고,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윗집이 걸릴 확률도 낮았을 거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자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양가 도움 없이 대출로 전셋집만 하나 얻어도 행복한 신혼생활이 펼쳐질 줄 알았던 내 순진함을 탓하기에 이르렀을 때는, 맹추 같았던 나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그해 말, 갑작스럽게 남편에게 홍콩 주재원 발령이 났다. 해외 주재원에게는 살 집을 지원해 주는 것은 물론, 현지 물가 수준에 맞춰 월급도 더 준다. 이사 비용이며 정착 비용 명목으로 나오는 목돈도 짭짤하다. 남편의 발령 소식에 우리는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특히 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통상적으로 주재원의 아내들은 휴직을 하고 남편을 따라나가 외국 생활을 만끽하는 삶을 누렸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 ‘주재원 와이프’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남편과 함께 나갈 수 없었다. 엄마는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했기에, 한 달이 멀다 하고 있는 서울의 대학병원 진료에 내가 모시고 가야 했다. 하루 종일 나만 찾는 16살 노견 영웅이도 걸렸다. 우리는 결국, 남편만 홍콩에 가서 살고 나는 두어 달에 한 번씩 홍콩과 서울을 오가며 지내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문득, 내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생각이 거기로 튀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집 마련에의 논리적인 접근이었다기보다는, 층간소음 따위 없을 ‘탑층’ 집을 사고야 말겠다는 한 맺힌 결의에 가까웠다. 물론 그 생각은 당시 우리의 자금 사정을 고려하면 ‘미친 생각’이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래도 나름의 계획은 있었다. 전세를 끼고 집을 매매한 뒤, 2년 뒤 세입자가 나갈 시점까지 악착같이 돈을 모아 전세금을 마련하는 것. 나는 곧바로 엑셀을 열어 대출이자, 월별 지출과 저축 가능 금액을 반영한 재무 시나리오를 짰다. 엄마 집에 얹혀살며 지출을 최소화하고, 남편도 허리띠를 졸라맨다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최악의 경우 돈이 부족하면 전세를 한 번 더 놓으면 될 일이었다.


남편의 출국까지 남은 시간은 두 달 남짓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매 주말,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하루에 2만보씩 걸으며 임장을 다녔다. 부동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때였다. 어디에서부터, 어떤 집을 봐야 할지 감조차 없었다. 지금이라면 고려도 하지 않을 엄한 집들까지 다 보고 다녔다. 하루에 열 군데의 집을 본 날도 있었다. 강남구, 서초구, 마용성처럼 쳐다도 볼 수 없는 동네만 제외하고는, 서울의 모든 동네를 샅샅이 훑었다.


정확히 한 달간의 임장을 마친 끝에, 우리는 마침내 매매할 집을 확정했고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앞으로는 돈 모을 일만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대감에 조금은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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