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자린고비
그렇게 2019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 해 출국을 앞두고, 12월에 우리는 집을 보러 홍콩으로 갔다. 서울 임장을 끝내자마자 홍콩 임장이라니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함께 어딘가로 떠난다는 생각에 꽤 신났다.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들떴던 기분은 싹 사라졌다. 전년도부터 간헐적으로 이어져오던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시위가 12월 들어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호텔 밖으로 잠시만 나가도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검게 무장한 수십 명의 시위대와 마주치기 일쑤였다. TV를 틀면 물대포가 쏟아지고,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뉴스가 나왔다. 우리는 외출도 삼가고 에이전시와 함께 하는 임장 스케줄만 소화한 채 귀국했다.
해가 바뀌고 남편은 1월 초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위가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마음이 뒤숭숭했지만, 곧 진정되기만 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나도 곧 홍콩으로 들어가 짧게나마 ‘주재원 와이프’의 특권을 누리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평일에는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며 혼자 카페에서 책을 읽고, 예쁜 거리를 거닐다 2층 버스도 타봐야지. 주말에는 남편과 하이킹도 하고 바다도 가봐야겠다. 남편도 매일 저녁 자기 전 영상통화를 할 때면 함께 가고 싶은 곳을 발견했다며 너도 분명 좋아할 거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런 우리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전례 없는, 더 기막힌 일이 터졌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코.로.나.였다.
이미 1월부터 뉴스로 들려왔던 이름이었지만, 사스나 메르스가 그랬던 것처럼 몇 달이면 잠잠해지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상황은 심상치 않게 전개되었다.
그렇게 3개월이 가고, 6개월이 가고… 1년이 흘렀다.
결국 나는 남편이 2년의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함께 가서 골랐던 홍콩 집에 다시는 가보지 못했다. 남편은 수영을 좋아하는 날 위해 커뮤니티 시설에 작은 수영장이 있는 집을 골라주었는데, 난 끝내 그 수영장 물에 발 한 번 담가보지 못했다.
아무리 코로나였다지만 단 한 번조차 홍콩에 가볼 수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야 설사 코로나에 걸린다 해도 앓고 지나가면 그만이었지만, 함께 살고 있던 엄마는 고위험군 기저질환자였다. 조금의 리스크도 감수할 수 없었다. 거기에 당시 의무 격리기간만 해도 한국은 2주, 홍콩은 무려 3주였기 때문에 한 번 다녀오려면 최소 두 달은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엄마도 엄마지만, 하루 종일 나만 찾는, 눈도 귀도 멀어버린 16살 노견 영웅이를 떼어놓고 가는 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홍콩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은 3주간 정부 지정 호텔에서 격리를 해야 했기에 비용이 상당히 부담되었다. 숙박비와 식비, 거기에 3배까지 뛰어버린 항공권 비용까지 하면 적어도 천만 원은 쓰게 될 것이었다. 당시 자린고비로 살던 우리에게 천만 원은 아주 큰돈이었기 때문에 고민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기약 없는 생이별을 계속 이어가는 쪽을 선택했다.
나는 집에 틀어박혀 철저한 고립 생활을 시작했다. 혹시 외출을 했다 코로나에 걸려오기라도 하면 엄마에게는 치명적인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예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덕분에 통장잔고는 빠르게 불어났다.
남편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면 재택근무로 전환된 것은 물론이고, 여름의 시작과 함께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외식까지 전면 금지하게 되면서 집에만 갇혀 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요리를 못하는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배달음식에 의존해 살게 되었다. 살인적인 물가로 유명한 홍콩에서 매 끼니를 배달음식으로 해결하다가는 돈이 줄줄 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정용 진공포장기를 사서 직접 냉동 밀키트를 만들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남편이 스스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음식은 그때도 지금도 라면과 계란프라이가 전부다. 이건 평생 아빠에게 뜨신 밥과 국을 차려 바치던 엄마를 보고 자란 내가 남편에게도 똑같이 해줘 버릇을 버린 탓이기에 그의 잘못은 전혀 없다.
무엇보다 이 국제 밀키트 배송 시스템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려 익일 배송이 가능하고, 우체국 국제 택배보다 비용도 훨씬 저렴한 사설 업체를 찾은 덕분이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내가 김포에 위치한 물류 창고까지 20킬로가 넘는 박스를 낑낑거리며 직접 가져다 드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전날 오후 3시까지 맡기면 다음날 아침 10시에 남편의 홍콩 집 문 앞까지 배송해 주시고 인증 사진까지 찍어 보내주시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서비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꽁꽁 얼려 보낸 냉동 음식들은 채 녹지도 않은 상태로 홍콩의 남편 집 냉동실로 안전히 옮겨졌다.
답답하고 막막하고 숨 막히는 나날들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악착같이 돈을 아꼈다. 나는 집에 처박혀 돈 자체를 쓰지 않았고, 남편은 올드보이처럼 냉동 밀키트를 받아먹으며 열심히 돈만 버는 성실한 외노자로 살았다. 그야말로 현대판 자린고비 부부가 따로 없었다.
신혼집에서는 윗집을 잘못 만나 생이별을 하고, 외국에서라도 같이 살아볼까 하니 세상에 한 번도 없던 이상한 역병까지 돌아 또 떨어져 사는 신세가 된 우리 부부에게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정말이지 그래야 하나 싶었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그 무렵의 일기를 찾아보니, 이렇게 적혀있었다.
‘19년도와 20년도는 나에게 가장 가혹한 시간으로 남을 것 같다. 설마 이보다 더 나빠질 게 있을까?’
사람은 한 치 앞 일을 모르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