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식 시험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번뜩 든 아이디어가 있었다. 특정 회사의 지원자와, 전/현직자들을 연결해 주는 서비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비상경계 전공자라 기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선/후배 인맥이 턱없이 부족했고, 이직을 할 때마다 지인의 지인까지 동원해 간신히 정보를 얻곤 했다. 지원자와 회사의 정보 불균형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획부터 운영까지 내 노동력을 갈아 넣으면 별다른 개발 없이도 테스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카카오톡 오픈채팅 기능을 활용해 모델이 워킹하는지만 테스트해 보기로 했다. 최소한의 구색만 갖춘 테스트플랜이었다. 지원자는 취업준비 카페들과 모교의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 모집했고, 전/현직자 풀은 나의 모든 직/간접 인맥을 총동원해 확보했다. 매칭 로직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양쪽을 매뉴얼로 일일이 매칭했다.
한 달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선정된 50명의 지원자에게 30분간의 채팅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채팅이 시작되면 매끄러운 운영을 위해 적정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가 멘트도 직접 입력했다. 이를 테면 ‘간단한 소개와 함께 대화를 시작해 주세요’, ‘종료시간 5분 전임을 알려드려요’ 같은 멘트들이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한 지원자는 이렇게 묻기도 했다.
“당신은 혹시 봇인가요?”
난 웃음이 터져 배를 잡고 웃었다.
테스트 서비스를 경험한 지원자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문제는 그다음 단계였다. 이제는 개발자 없이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내 사비를 들여 개발자를 고용하거나, 투자를 받아야 했다. 덜컥 겁이 났다. 이게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인가 확신이 없었다. 당시 내게 스타트업의 이미지는 나와는 다른 ‘난 놈’들만 할 수 있는 거였다.
난 예전부터 그랬다. 고등학생 때도, 내 목표 학교는 늘 연고대였지, 서울대는 아예 리스트에 없었다. 서울대는 특출 난 수재들만 갈 수 있는 것이고, 나 같은 평민은 언감생심 쳐다도 볼 수 없는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타트업 비즈니스도 당시의 내겐 그런 느낌이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감히 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나중에 투자라도 받게 된다면, 남의 돈을 받아놓고 내가 두 다리 뻗고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아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것 같았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똑같은 모델의 서비스가 론칭되어 SNS 광고를 집행하는 걸 보게 되었다. 그 서비스는 지금까지도 운영되고 있고, 유사한 모델의 다른 서비스들도 여럿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겁 없이 뛰어들어봤다면, 한 스텝이라도 더 가봤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이따금씩 들곤 한다.
어느새 20년 가을이 되었다. 퇴사한 지 1년 반이나 지나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현실로 와닿으면서 불안감이 훅 하고 밀려왔다. ‘만약 다시 회사로 돌아가실 거면 늦어도 1년 안에는 돌아가셔야 돼요.’라고 했던 회사 선배의 말이 떠오르며, 백수 생활이 기약 없이 길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불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돌아갈 다리를 냅다 태워버린 건 정말 맞는 선택이었을까. 처음으로 내 선택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찾는다는 건 내가 상상한 것보다 몇 배로 더 어려운 일이었다. 평생 객관식 시험만 치며 살다가 처음으로 텅 빈 주관식 칸을 받아 든 느낌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는 불안 사이를 오가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보면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애초에 바로 뭔가를 할 계획은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감’이 떨어질까 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늘 모범답안 같았던 내 인생이 어느새 C학점이나 D학점쯤으로 떨어져 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호기롭게 나가더니 뭐 별 것도 없었네?’라고 모두가 나에 대해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불안과의 싸움이 앞으로 나에게 가장 큰 숙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 이 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