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지지 않는
그럼에도 내가 엄마를 외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우리는 마치 한 몸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직후부터 엄마와 아빠의 사이는 나빠졌고 많이 싸웠다고 했다. 그에 관한 나의 가장 오랜 기억은, 대여섯 살 무렵의 기억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장면의 잔상이다. 검은 줄무늬 티에 빨간 쫄바지를 입고 깜찍하게 머리를 올려 묶은 네 살 무렵의 내 모습이 담긴 아주 커다란 회색 프레임의 액자. 그리고 산산조각 난 그 액자에서 힘 없이 떨어져 나와 거실을 나뒹굴던 유리 파편들.
그다음 기억은 아빠와 싸운 뒤 화장실에 주저앉아 울고 있던 엄마와, 그런 엄마 앞에 쪼그려 앉아 아빠랑 이혼하면 안 되냐고 애원하던 아홉 살의 나.
그리고 그다음은 초등학교 4-5학년쯤인가 아빠가 대리석 재떨이를 TV로 던져 산산조각 난 브라운관 파편들로 반짝였던 거실.
또 그다음은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아빠가 가위를 들고 가스밸브를 잘라버리겠다고 소리치고 있었고, 그걸 자르면 어떻게 되는 건지 잘은 몰랐지만 어쨌든 큰일이 날 것 같아 그러지 말라고 울며 매달렸던 나를 떼어냈던 그의 손.
그리고 또…
이 모든 기억의 장면들 속에서 늘 같은 모습으로 있는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날 끌어안고 울고만 있는 엄마다.
난 아빠랑 제발 이혼하면 안 되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다고 했다. 외할머니의 재가로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던 엄마는- 지금이야 그런 일이 흉도 되지 않지만, 그 당시엔 수도 없이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이었을 것이다- 성이 다른 언니들의 구박과 괴롭힘에 시달리며, 서러운 일을 많이 겪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자기 자식만큼은 평범한 가정에서 남 손가락질받지 않으며 모자란 것 없이 키우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엄마의 그 선택으로 난 평생을 지긋지긋하게 싸우는 부모 밑에서 상처가 많은 사람으로 자랐지만, 또 한편으론 그 선택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살며 유학도 다녀오고 명문대도 졸업했으니, 엄마의 목표는 일부 달성된 셈이리라.
그렇게 ‘나 때문에’ 모든 걸 참고 산다는 불쌍한 엄마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착한 아이로 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난 일찍 철이 들었고, 엄마 속 한 번 썩이지 않으며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딸이 되어 엄마의 기쁨이 되어주었다. 엄마는 자기를 위해 애쓰는 기특한 어린 딸을 때론 본인의 친구라고, 자매라고, 또 어떤 때는 엄마라고도 여겼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끔찍한 존재였다.
엄마는 나를 동네에서 꽤 유명했던 사립 초등학교에 보냈다. 그곳의 학부형들은 대부분 소위 말하는 ‘사 자’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우리 아빠는 장사를 하는 자영업자였다. 눈치가 빤하고 애어른이었던 나는 언젠가부터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들에게 아빠의 직업을 말할 때 어딘가 모르게 움츠려든다는 걸 알아챘고, 내가 1등을 해서 다른 엄마들 코를 다 납작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생각했다. 2학년 2학기가 되었을 때, 엄마들은 우리 엄마에게 연락해 자기네 과외 그룹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부탁했고, 그렇게 나는 학년에서 제일 똘똘하다고 소문이 난 소수 정예 아이들의 그룹에 끼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부터 엄마는 아빠와 함께 일하던 가게에서 나와 레스토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난 매일 저녁 혼자 숙제를 마치고 다음 날 학교에 갈 가방을 챙겨놓은 뒤,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올 엄마를 위해 편지를 써놓고 잠에 들었다. 편지엔 내가 좋아하던 사탕이나 초콜릿 따위를 테이프로 꼭 붙여두었다. 아침에는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 혼자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엄마를 깨워주곤 했다. 그리고 나는 강당에서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성적 최우수상을 받고 화려하게 졸업을 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두 어달 만에 자퇴를 하고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육두문자를 남발하고 체벌을 일삼는 선생님들에게 충격을 받아서였다. 엄마를 혼자 두고 가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엄마를 호강시켜 주려면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고 되뇌었다.
캐나다에 가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엄마와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엄마는 아빠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전하지 않았지만, 방학 때 한국에 들어와서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소식이 희소식이어서가 아니라, 차마 전할 수 없는 소식이 많아서였다.
1학년 겨울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빠는 또 집을 다 때려 부쉈고, 순식간에 온 바닥이 유리조각으로 뒤덮였다. 어떤 강렬한 기억들은 필름에 새겨진 사진처럼,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절대 흐려지지 않는다. 거실에 있던 가구들의 생김새와, 천장등의 빛깔과 조도. 군데군데 파이고 핏자국이 묻어 있던 마룻바닥. 그리고 내가 발을 다칠까 봐 엄마가 황급히 슬리퍼를 가져와 신겨주었던 것과, 그 와중에 내가 강아지 마로를 들어 안았던 것까지. 그날의 오랜 사진 한 장은 때로는 번쩍하고 플래시가 터지는 것처럼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영상처럼 꿈속에서 재생되기도 한다.
우리는 한겨울에 실내복에 슬리퍼 바람으로 마로까지 안고 엄마 친구네 집으로 도망을 갔다. 거기서 며칠을 지내다가 내 출국일이 임박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빠는 문 걸쇠를 박스테이프로 칭칭 감아 놓고 문을 아예 열 수 없게 해 놨다. 엄마는 애 짐은 싸서 보내야 하지 않겠냐며 문만 좀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캐나다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엄마가 써서 내 가방에 몰래 넣어뒀던 편지를 읽으며 숨죽여 울었던 기억은 또 다른 사진 한 장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불이 다 꺼지고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조심조심 편지를 꺼내 소리 내 울지도 못하고 눈물을 끅끅 삼키며 읽어 내려갔다. 엄마도 나처럼 똑같이 울면서 눌러썼을 한 글자 한 글자를 눈에 담으면서, 더 열심히 공부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 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처음 갔을 때 ‘recess’가 뭔지 몰라 모두가 밖으로 우르르 뛰어나갈 때 혼자 교실에 우두커니 남아 있었던 나는, 그 이듬해에 전교 1등을 했다. 그래봤자 고작 열네 살 어린아이였던 나는, 혼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서러운 일들이 많았다. 당시 다른 또래 아이들은 모두 엄마가 함께 와서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엄마 없이 혼자 온 건 나뿐이었다. 홈스테이 가족은 알게 모르게 본인 자녀들과 나를 차별했다. 서러움이 폭발했던 날, 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처음으로 떼를 썼다.
“내가 한국 애들 중에서 공부도 운동도 제일 잘하는데!! 다른 애들은 다 엄마랑 같이 사는데 왜 나는 라이드도 눈치 보면서 해달라고 해야 해? 서럽단 말이야!! 열받는다고!! 엄마도 와!!”
엄마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엄마는 아빠랑 같이 살아야 해서 너한테 못 가. 오고 싶으면 네가 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빠랑 맨날 싸우기나 하면서 왜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건지. 꽤 한참 뒤에야 알았다. ‘아빠랑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빠를 사랑해서 같이 있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엄마도 나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 나보다도 더 굴뚝같았을 것임을.
그렇게 2년 반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바로 중학교 검정고시를 치르고(한국과 캐나다의 수업일수가 달라 며칠 차이로 고등학교 입학 자격에 미달되었다) 일반고에 들어갔다. 3년 동안 친구들과 노래방, 영화관 한 번을 안 가고 공부만 했다. 무슨 드라마가 유행하고 어떤 아이돌이 인기인지도 몰랐다. 캐나다에 남아있던 한국 애들한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한국에 돌아와서도 너네보다 잘할 수 있다고.
그렇게 연대 합격이 결정됐을 때, 아빠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고생했다고 말하며 천만 원이 넘는 다이아 반지를 사줬다. 엄마의 행복한 표정을 보니 나도 좋았다.
대학교에 가서도 나는 엄마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날까 싶어 수업만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늦게까지 맘 편히 놀아본 적도 없었다.
그 후로도 쭉, 늘 그랬다. 내가 한국에 있든, 캐나다로 유학을 가있든,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있든, 일본에서 일을 하든, 결혼을 해 내 가정을 꾸려 살든, 난 늘 엄마가 걱정되고 신경 쓰였다. 엄마는 내게 목에 걸린 생선가시 같았다. 내가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도무지 신경을 끊을 수가 없는 그런 존재. 엄마는 항상 내 목 한편에 걸려있다.
그래서 난 엄마를 끊어낼 수 없었다. 엄마는 내 목에 걸린 불편한 가시이기도했지만,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내 삶의 동기이자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