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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터널 속

끝이 보이지 않아

by 지안

올 것 같지 않았던 22년 봄이 왔다. 우리 부부는 계획대로 2년간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전세입자 퇴거 시 돌려줄 전세자금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엄마의 이사도 무사히 끝냈고, 남편은 홍콩에서 주재원 생활을 마친 후 돌아왔다. 나는 엄마집과 서울을 오가며 입주할 아파트의 인테리어 공사를 진행했다. 마침내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엄마집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날, 짐을 전부 차에 싣고 영웅이까지 태운 뒤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엄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동안 미안했어. 가서는 행복하게만 잘 살아.”


나도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얼른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드디어 꿈에 그리던 서울 집에 입주를 했다. 집은 만족스러웠다. 탑층이라 절간처럼 고요했다. 내 머리 위에 아무도 없다는 그 감각만으로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사 스트레스 때문인지, 영웅이가 갑자기 걷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미 귀도 멀고 눈도 보이지 않던 녀석에게 하루아침에 완전히 새로운 환경으로 옮겨진 것은 엄청난 공포였을 것이다. 첫 며칠은 여기저기 부딪히면서도 집 구조를 익혀보려 조금씩 움직여 보더니 이내 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고, 그렇게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엄마와 더 이상 같이 살지 않으니 마침내 자유롭게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난 금세 다시 집에 갇힌 고립 신세가 되었다. 영웅이는 혼자 힘으로는 일어서지 못하고 종일 누워만 있었다. 그러니 적어도 한 시간에 한 번씩은 자세를 바꿔주어야 했고, 목이 마르다고 신호를 보내면 고개를 받쳐 들고 물을 먹여줘야 했으며, 배변 의사를 보이면 일으켜 세워 잡고 배변을 시켜줘야 했다. 신기한 건 영웅이의 의사 표현을 나만 알아챌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집에만 갇혀 있는 나를 안쓰럽게 여긴 친구들이 한 번씩 맛있는 걸 사들고 놀러 와 주었는데, 영웅이의 눈빛이나 미세한 고갯짓만 보고도 녀석의 요청사항을 단박에 알아차리는 날 보고는 정말 ‘개엄마’가 맞다며 혀를 내둘렀다.


영웅이를 돌보는 것은 신생아를 키우는 일과 맞먹었다. 내가 신생아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주변 친구들의 경험을 미루어보면 그랬다. 그나마 신생아는 1년 남짓 지나면 엄마들이 한숨 돌릴 수라도 있게 되지만, 영웅이를 돌보는 일은 기약도 없었다. 영웅이를 혼자 두고 집을 비우는 것은 당연히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밤에 깊은 잠을 자는 것도 힘들었다. 남편과 2년 만에 재회를 했지만 우리는 근사한 곳에 가서 외식 한 번을 할 수 없었다. 집 코 앞에 있는 멸치국숫집에 가서 면을 마시듯이 흡입하고, 거의 뛰듯이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게 우리가 부릴 수 있는 최대의 사치였다.


몸도 마음도 지쳐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나에게, 엄마는 쉴 새 없이 잽을 날렸다. 이혼이라는 건 역시나 서류에 도장 찍는다고 무 자르듯 깨끗하게 끝나는 게 아니었다. 재산 분할이 말끔히 정리되지 않아 돈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고, 각종 행정 서류상으로 엮여있던 둘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데에도 시간과 품이 꽤 들었다. 그런 일들로 아빠와 연락이 필요할 때마다 엄마는 나를 찾아댔다. 엄마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가 되어있었다. 특히나 아빠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엄마는 그에게 말 한마디 직접 건네는 것도 하지 못했다. 허구한 날 아빠에게 보낼 카톡 문구를 나에게 대신 써달라고 했고, 아빠에게 전화라도 오면 대단한 큰일이 난 것처럼 겁에 질린 목소리로 날 찾아 있는 대로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그런 엄마의 ‘부탁’을 ‘거역’하기라도 하면 ‘너네 아빠랑 이혼하면 네가 나 다 책임진댔잖아!’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생떼를 쓰며 나를 압박했다. (물론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아빠는 엄마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인들 아빠와 대화가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본인 인생 찾겠다고 아픈 아내를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친 그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은 나도 죽기보다 싫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엄마의 카톡과 전화에, 난 핸드폰에 ‘엄마’라는 글자가 뜨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렇게 퇴사를 한 지 3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기약 없이 길어지고 있는 백수 생활에 조바심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전 회사 동료들이 ‘잘 지내시죠?’라고 안부 인사를 보내면, 사실은 ‘여태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세요?’라고 묻는 것 같아 창피해서 숨고 싶었다.


남편이 자러 들어가면, 난 영웅이를 안아 들고 혼자 베란다 창 밖을 바라보며 소리 죽여 울었다. 장소만 바뀌었지 캄캄한 창 밖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난 그대로였다. 이 집을 처음 보러 왔던 날, 뷰에 반해 남편과 기대에 찬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볼 때만 해도, 매일 밤 형형색색의 불이 밝혀지는 남산타워가 이렇게 슬퍼 보일 줄은 몰랐었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울었고, 어떤 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편 앞에서도 무너져 목놓아 울었다. 남편은 그럴 때마다 나를 어르고 달래주었고, 어떤 날은 나를 끌어안은 채로 자기도 같이 소리 내 울었다.


우리는 여전히, 터널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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